꼭 석 달 이틀 전입니다. 태어난 지 하루 만에 서울 여의도로 왔어요. 이곳에서 숨죽인 지 어느덧 94일이 지났네요. 우량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작은 몸집도 아니라 답답해요. 저, 6조7000억원 짜리거든요. 맞아요. 사람들은 저를 ‘추경이’라고 부릅니다. 제 갑갑한 사정 한 번 들어보실래요.
탄생은 그럴싸했습니다. 정부세종청사 국무회의실에서 4월 24일 처음 빛을 봤어요. 누가 만들었냐고요? 말하자면 복잡한데…. 손수 모습을 빚은 건 기획재정부 공무원들입니다. 산고(産苦)를 거친 기재부 국장님이 국무총리 의결 이튿날 절 국회 사무처 의안과에 데려다줬어요. 그때부터 “빨리 처리되긴 힘들 것”이란 귀띔을 듣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늦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다들 기억하시죠. 올봄 미세먼지 때문에 힘들었던 거. 출근길 한 치 앞이 안 보였던 3월 어느 날, 문재인 대통령께서 “필요하다면 추경을 긴급 편성하라”고 제 이름을 부르셨대요. 이쯤에서 말씀드리는 제 풀네임은 ‘2019년도 제1회 추가경정예산안’입니다. 올해 예산안을 시행한 지 두 달 만에 예산 추가를 논하신 건데, 시작부터 야당에선 ‘땜질식 예산 편성’,‘총선용 정치 추경’이라는 비난이 나왔죠. 패스트트랙 사태로 한창 국회가 싸움터였던 때라 더 암울했습니다.
그런데 왜 불길한 해석은 틀리는 법이 없을까요. 그때부터 본격 ‘땜질’이 시작됐습니다. 4월 강원도에 산불이 나자 정부는 제 컨셉을 ‘재해·재난용 추경’으로 잡아줬어요. 미세먼지 대책에 산불 지원, 포항 지진피해 지원을 덧붙인 것까진 그래도 참을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죠. 지금 제 모습 좀 보세요. 일자리 사업, 경기 부양용 민생 대책, 성장률 대책은 물론이고 일반 예산 소요 대책까지 모조리 쓸어 담아 ‘누더기 추경이’란 별명까지 얻게 됐잖아요. 어휴.
더 끔찍한 건 제가 ‘국회 장수 추경이’ 1등 기록을 갈아치울 태세라는 겁니다. 19년 전(2000년) 김대중 정부 때 107일 표류한 추경이가 지금까지 제일 오래 기다린 기록이래요. 세상에… 2주만 지나면 저 기록 깨요. 그 안에 어떻게든 여야가 합의를 봤으면 좋겠는데 그간 행태를 보니 어림없겠습니다. 한국당이 ‘독소 예산’, 사전 선거운동용’을 운운하더니 최근엔 ‘경제청문회’, ‘국정조사’도 모자라 ‘정경두 해임안’까지 들이밀며 맞바꾸자고 하더군요.
야속하긴 민주당도 마찬가집니다. 국회를 떠돌다 들어보니 사정을 잘 아는 어떤 의원님은 “지도부가 협상 요령과 의지가 없다. 무조건 외골수 통과를 고집할 게 아니라 야당과 서로 주고받는 딜(거래)을 시도해야 한다”고 개탄하시더라고요. 실은 대통령이 절 강조하며 부르는 말씀도 자꾸 반복되니 저도 슬슬 식상해지더군요. 야당이 ‘깜깜이 예산’이라며 계속 “구체적 내역을 달라”는데 민주당은 왜 계속 저를 베일에 쌓아 두는지도 모르겠어요. 혹시 신비주의?
이달 초 일본이 경제 보복을 시작하면서 전 또 몸집을 불리게 됐어요. 3000억원을 더할지, 8000억원을 더할지, 2700억원을 추가할지를 두고 들쑥날쑥 말이 많았죠. 사실 재작년 슈퍼 추경(11조원)과 지난해 미니 추경(3조8000억원)에 비하면 제 체급(약 7조원)은 중간쯤 됩니다. 지난 3월 국제통화기금(IMF)이 권고했던 추경 규모는 9조원이래요. 좀 더 커져도 되겠다고요? 글쎄요. 제 조달비용의 절반 이상(3조6000억원)을 적자 국채 발행으로 충당하는 걸요. 현 정부 들어 처음 있는 일입니다.
요즘 정부와 여당에서는 자꾸 절 두고 “타이밍을 놓쳤다”고 해요. 7월 말이 되니 날씨도 덥고, 정신이 혼미해지긴 하네요. 이렇게 끌다간 내년도 예산안 제출(9월 3일)이 임박해 아예 국회 귀신으로 사라져버릴지도 모르겠네요. 처리 시한만 갱신하는 의원님들, 제 말 들리시나요? 내년엔 부디 기억해주세요. 추경이는 선거 해결사도, 만병통치약도 아니라는 걸.
심새롬 기자 saerom@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