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가방에 통장과 현금 다발, 혹시?”… 보이스피싱 현행범 잡은 시민

중앙일보

입력

지난 11일 오후 2시 51분쯤 대전시 동구 용전동의 한 은행에서 업무를 보고 나오던 김모(62)씨는 현금자동입출금기(ATM) 앞에서 1만원·오만원권을 두툼하게 손에 쥐고 입금하는 젊은 남성을 발견했다. 수백만원이 넘는 현금이면 창구에서 한꺼번에 송금할 수도 있는데 꾸역꾸역 ATM에 돈을 넣는 모습이 의심스러웠다. 더구나 남성 옆에 있던 가방에는 현금다발과 통장 여러 개가 담겨 있었다.

지난 23일 황운하 대전지방경찰청장(오른쪽)이 보이스피싱 현금 수거책을 검거하는 데 기여한 시민에게 표창장을 주고 있다. [사진 대전경찰청]

지난 23일 황운하 대전지방경찰청장(오른쪽)이 보이스피싱 현금 수거책을 검거하는 데 기여한 시민에게 표창장을 주고 있다. [사진 대전경찰청]

순간 김씨는 보이스피싱(전화금융사기)을 의심했다. 최근 신문과 TV를 통해 젊은 청년들이 보이스피싱 범죄에 가담한다는 뉴스를 본 기억도 났다. 태연하게 은행을 나온 김씨는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다. 3분쯤 뒤 도착한 경찰은 은행 안으로 들어가 여전히 돈을 송금하던 이씨를 조사한 뒤 현행범으로 체포했다.

60대 시민, ATM에서 현금 보내던 남성 발견 112신고 #출동한 경찰, 범죄 지시 총책에게 돈보내던 남성 검거 #지난해 전국에서 3만4132건의 보이스피싱 범죄 피해

경찰에 따르면 ATM에서 돈을 보내던 남성은 이모(29)씨로 이날 오전 보이스피싱 총책으로부터 지시를 받고 정해진 계좌로 돈을 보내던 중이었다. 이씨 가방에서는 현금 1785만원과 통장 6개가 발견됐다. 현금은 모두 보이스피싱에 속아 넘어간 피해자들에게서 받은 돈이었다. 통장 역시 명의가 다른 대포통장이었다.

이씨는 피해자들의 대포통장으로 보내온 돈을 출금한 뒤 총책의 계좌로 다시 송금하다 김씨의 신고로 덜미가 잡혔다. 이미 보낸 돈이 얼마인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그는 경찰에서 “총책으로부터 지시를 받은 돈이 1억9980만원이었다”고 진술했다.

조사 결과 이씨에게 범행을 지시한 총책에게 당한 피해자는 10여 명인 것으로 확인됐다. 피해자 가운데는 현직 공무원인 A씨(29)도 포함됐다. 그는 “수사 대상인데 돈을 보내지 않으면 구속될 수도 있다”는 말에 속아 대포통장으로 6500만원을 보냈다고 한다.

대전경찰청이 지난달 12일 '보이스피싱 피해 예방을 위한 공동협의체 발대식'을 열고 있다. [연합뉴스]

대전경찰청이 지난달 12일 '보이스피싱 피해 예방을 위한 공동협의체 발대식'을 열고 있다. [연합뉴스]

이씨는 송금한 총액 가운데 4%가량을 수당으로 받는 조건으로 범행에 가담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른바 ‘현금수거책’으로 대포통장에서 인출한 1억9980만원을 윗선에 보내면 800만원가량을 받는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직장을 구하지 못한 청년이나 대학생들이 범죄에 가담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씨 역시 무직이었다.

이씨는 경찰에서 “총책이 누구인지 모른다. 전화로 지시를 받고 통장에서 돈을 찾아 지정된 계좌로 보내는 일을 했다”고 말했다. 경찰은 이씨를 사기 혐의로 구속했다. 대전경찰청은 보이스피싱 현행범을 신고한 김씨에게 표창장을 주고 신고포상금도 지급했다.

김씨는 “뉴스를 통해 접했던 보이스피싱 범죄자들의 모습이 기억나 신고한 것”이라며 “앞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보이스피싱의 위험성을 알리겠다”고 말했다.

현직 공무원인 A씨처럼 보이스피싱 피해자는 매년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전국에서 발생한 보이스피싱 피해는 3만4132건으로 피해 금액은 4040억원에 달했다. 2013년 1429억원(2만1634건)이던 피해 금액이 5년 만에 2.8배나 증가한 것이다. 이 가운데 대출 사기형 범죄가 가파르게 늘어 2015년 1만3656건이던 게 지난해는 2만7910건으로 급증했다.

보이스피싱 범죄와 관련해 대대적인 수사를 진행 중인 대전지방경찰청. [중앙포토]

보이스피싱 범죄와 관련해 대대적인 수사를 진행 중인 대전지방경찰청. [중앙포토]

대전경찰청 김현정 수사2계장은 “보이스피싱 범죄 유형이 진화해 한 가지 수법이 막히면 다른 수법으로 접근하고 있다”며 “연구원이나 교사 등도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만큼 철저한 예방과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대전=신진호 기자 shin.jinho@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