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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의 사생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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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성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성탁 런던특파원

김성탁 런던특파원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자신을 낙타에 비유한 적이 있다. 낙타는 물을 마시지 않고 사막에서 며칠간 버티는데, 자신은 잠을 조절할 수 있다면서다. 그는 독일 언론 디 차이트에 “5~6일 정도 잠을 아주 적게 자고 일할 수 있다. 그리고 나선 하루 정도 10~12시간 숙면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메르켈은 정상외교에서 심야까지 잘 버티는 정상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그런 그가 최근 3주 동안 외국 정상 환영행사 등에서 세 차례 몸을 떨었다. 버텨보려고 팔을 교차해 붙잡아도 봤지만 심하게 그의 몸이 떨리는 영상이 삽시간에 퍼졌다. 우직한 리더십으로 ‘무티’(엄마)로 불린 메르켈의 이런 모습은 독일은 물론이고 유럽, 세계인에게 놀라움과 우려로 다가왔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17일(현지시간) 65세 생일을 맞았다. [AP=연합뉴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17일(현지시간) 65세 생일을 맞았다. [AP=연합뉴스]

메르켈은 기자회견에서 “건강이 괜찮고, 아직 (증상이) 끝난 것은 아니지만 업무에 문제가 없다”고 강조했다. 첫 번째 증상은 탈수 때문이라고 해명했지만, 신경학적 질환일 수 있다는 등 확인되지 않은 루머가 돌았다. 정치적으로 반대 측에선 총리의 건강은 중요한 문제라며 공세를 폈다.

눈에 띄는 것은 국민 여론조사 결과 과반이 넘는 59%가 총리의 건강 문제는 그의 사생활이라는 답변을 내놓은 점이다. 39%만 총리가 상세 진료 내용을 설명하라고 요구했다. 상당수 주요 현지 언론도 오피니언 등에서 누구에게나 말할 자유가 있어 총리를 비판할 수 있지만, 개인의 사생활도 중요하다며 메르켈이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는 한 문제 될 게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독일에서는 나치 정부가 개인 정보를 들여다보고 탄압한 적이 있어 사생활 보호를 최우선 가치 중 하나로 꼽는다고 한다. 정치인 등 공직자는 수입의 한 푼이라도 신고하는 등 꼼꼼한 감시를 받지만, 업무에 지장이 없다면 사생활은 보호하자는 공감대가 있다. 유럽에서는 프랑수아 올랑드 전 프랑스 대통령과 여배우 쥘리 가예의 연애설을 보도한 주간지에 대해 프랑스 법원이 사생활과 초상권을 침해했다며 배상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보리스 존슨 전 영국 외무장관은 자택에서 애인과 다퉈 이웃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까지 했지만 “사랑하는 이들이 불공정한 대접을 받을 수 있다”며 끝까지 설명을 거부했다. 정치적 비판이 쏟아졌지만 차기 총리로 유력하다.

한국에서도 인사철이면 공직자에 대한 검증이 자주 실시된다. 부정이나 비리, 범법 행위가 있는지와 직무 관련 능력 등은 엄격히 따져야 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를 사적 영역으로 놔둘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이젠 사생활과 공적 검증 대상의 경계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겠다.

김성탁 런던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