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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습 키스" 배심원 6명 유죄···무고녀 어떻게 혐의 벗었나[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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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이 사건이 이렇게 길어질 줄 누구도 몰랐습니다. 2014년 6월 부현정(34)씨가 직장 선배 A씨에게 강제추행을 당했다는 고소장을 경찰에 제출할 때 말입니다.

배심원 6:1 유죄로 본 무고사건, 대법원은 판결 뒤집었다

6개월 뒤 검찰은 A씨에 대해 불기소 결정을 합니다. 증거가 충분하지 않아 A씨의 강제추행 혐의를 입증할 수 없다는 겁니다.

부씨는 항고했습니다. 항고는 검사의 불기소 결정에 불복해 상급기관인 고등검찰청에 기소 여부를 다시 결정해달라고 요청하는 절차입니다. 한 달쯤 뒤 항고도 기각됐습니다.

이번엔 재정신청을 냈습니다. 재정신청은 검찰이 기소하지 않는 것에 불복해 법원에 정식 재판을 열어달라고 요청하는 제도입니다. 석 달 뒤 법원도 부씨의 재정신청을 기각했습니다. 부씨는 강제추행을 당했다고 주장했지만 더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그렇게 반년쯤 지났을까. 선배 A씨의 반격이 시작됐습니다. 2016년 1월 A씨는부씨를 무고죄로 고소했습니다. 그해 9월 검찰은 부씨를 기소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A씨는 불복해 항고했지만 결과는 기각이었습니다. A씨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법원에 재정신청을 냈고 2017년 2월 법원이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2014년 6월 부씨가 처음 강제추행 고소장을 낸 지 2년 8개월여 만에 상황이 180도 바뀐 겁니다. A씨는 무고죄 피해자로, 부씨는 무고죄 피고인으로 처음 법정에 서게 됐습니다.

국민참여재판 1심…CCTV가 움직인 배심원 마음

2017년 8월 25일 아침 10시 45분. 부씨와 A씨의 첫 재판이 열렸습니다. 1심은 국민참여재판으로 열렸습니다. 국민참여재판은 무작위로 선정된 만 20세 이상의 국민이 배심원으로 활동하는 재판입니다.

배심원들은 변호사와 검사측의 주장을 듣고, 증인 신문을 보고 궁금한 점이 있으면 재판장을 통해 질문하며 피고인의 유·무죄에 대해 평의합니다. 재판부는 배심원들의 평의 결과를 존중하지만 그 결과를 재판부가 따라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국민참여재판과 배심원단의 모습. 사진은 기사와 관계없음 [중앙포토]

국민참여재판과 배심원단의 모습. 사진은 기사와 관계없음 [중앙포토]

속기록에 남겨진, 법정에서 배심원들이 들은 사건 당일(2014년 5월 26일)의 상황은 이렇습니다.

저녁 6시가 조금 넘은 시각 두 사람은 직장 근처 지하철역 부근에서 만나 한 와인 집으로 향합니다. 오후 7시쯤부터 시작된 술자리는 밤 11시쯤 끝났습니다. 와인 2병을 주문해 1병 이상을 나눠 마신 두 사람은 택시가 잡히지 않자 가게 부근을 걸었습니다.

길을 따라 돌던 두 사람은 대로변 편의점에 들러 아이스크림과 커피 우유를 삽니다. 이때가 밤 11시 45분쯤입니다. 이때부터 부씨와 A씨의 진술이 크게 엇갈립니다.

① 강제추행이 있었다는 소파는 있었나  
부씨는 “편의점에서 나온 뒤 A씨가 골목길에 있던 버려진 소파에 앉았고, 이것만 먹고 가자면서 앉아보라 해 앉아서 잠시 이야기를 하다 일어났더니 A씨가 팔을 갑자기 끌어서 기습키스를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부씨가 A씨를 밀쳐내자 A씨는 “너도 나한테 뽀뽀해줘”라고 말했고, 부씨는 너무 화가 나 도망치듯 자리를 떠나 택시에 탔다고 합니다. 그런데 A씨가 따라와 택시에 탔고, 부씨는 바로 택시에서 내려 다른 택시를 타고 자리를 떴다고 주장합니다.

A씨는 “소파는 본 적도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다만 “벤치에 앉아 손을 잡고 이야기를 나눈 적은 있는데 이건 편의점에 가기 전”이라고 했습니다. 우유와 아이스크림을 사서 먹고 “이제 들어가자”고 이야기를 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택시를 탔다는 겁니다. 부씨를 데려다주려고 같이 택시를 탔는데 부씨가 극구 혼자 가겠다고 해서 둘 다 택시에서 내렸다가 부씨를 먼저 다른 택시에 태워 보내고 자신도 택시를 잡아 집으로 갔다고 했습니다.

② CCTV에 드러난 스킨십?
법정에선 A씨가 직접 구했다는 CCTV 영상이 공개됐습니다. 술집에서 나온 뒤 편의점에 가기 전까지 술집 부근을 걷는 두 사람의 모습의 일부입니다. 두 사람은 CCTV 영상의 모습을 두고도 서로 다른 주장을 폈습니다.

A씨는 “손을 잡고, 부씨가 내게 팔짱을 끼고 포옹도 했고, 입도 좀 맞췄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부씨는 “A씨가 내 손을 끌어 나를 안았고, 팔짱이 아니라 집에 가지 않는 A씨의 옷자락을 당긴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부씨는 기습키스를 당하기 전까지는 입맞춤 시도는 없었고 직장 선배이기도 해서 “저 남자가 취해서 이러나 싶었다”고 말했습니다. 부씨가 주장한 기습키스 당시의 상황을 찍은 CCTV는 없었습니다.

③ 택시에서 문자ㆍ사건 다음날 사과는 왜
A씨는 먼저 떠난 부씨에게 “모든 것이 예상되지만 어쨌든 잘 들어가고 내일 다시 보자 걱정되지만 일단 안녕”이라는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A씨는 “극구 혼자 택시를 타고 간다고 하길래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것이 예상된다는 취지였고, 늦은 시간이어서 걱정된다는 인사치레”라고 설명했습니다.

사건 다음날 부씨와 부씨 남자친구, A씨, 회사 동료 몇 명이 A씨의 사과를 듣기 위해 모인 자리의 녹취록도 공개됐습니다. 녹취록에는 A씨가 “다 기억납니다. 제가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라는 말을 합니다. A씨는 이를 “처음 겪어본 상황에 어떻게든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고 당황해서 인정한 것”이라고 증언했습니다.

1심에서 7명의 배심원 중 6명이 부씨의 ‘유죄’를 택했습니다. 재판부도 같은 결론을 냈습니다. 배심원들의 평의 과정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된 이 사건 판결문에도 재판부의 판단 근거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다만 법정에서 판사들이 피고인에게 던진 질문으로 그들의 심증을 추측할 수는 있습니다.

속기록에 남겨진, 판사들의 부씨에 대한 질문은 CCTV 화면에 집중됐습니다. 판사들은 CCTV 화면을 가리키며 “둘이 데이트한 거 아니냐”고 묻거나 “추행 사건 뒤 편의점에 사람이 있었지요”라며 왜 주변에 도움을 청하지 않았는지 물었습니다. 사건 현장 부근에서 버려진 소파는 이미 찾을 수 없었는데 근처에 벤치가 있었다는 점도 근거가 된 거로 보입니다. 배심원과 재판부는 A씨 말이 더 신빙성이 있다고 봤습니다. 부씨는 1심에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았습니다.

‘무고녀’될 뻔 한 1ㆍ2심…3심서 어떻게 뒤집혔나

항소심은 항소를 기각합니다. 국민참여재판에서 배심원 평의가 재판부 의견과 같아 그대로 채택됐다면 명백하게 반대되는 사정이 나타나지 않는 한 이는 한층 더 존중돼야 한다는 겁니다.

2심은 ▶A씨의 강제추행 건은 무혐의 처분에 재정신청도 기각됐고 ▶술집에서 나온 뒤 CCTV 영상은 부씨와 A씨가 자연스럽게 신체 접촉을 하는 듯하고 ▶부씨가 접촉을 저지하거나 거부감을 표현하는 모습은 볼 수 없다고 판결문에 썼습니다.

또 “만약 부씨가 두려움을 느꼈다면 근처 편의점 직원에게 도움을 요청해보지 않고 단순히 택시를 탔다는 것은 쉽사리 납득하기 어렵다”고 밝혔습니다. 부씨는 “A씨가 진정한 사과를 하지 않아 고소했다”고 진술해왔지만 항소심은 “A씨는 사건 바로 다음 날 여러 명이 모인 자리에서 무릎까지 꿇고 사과했다”며 고소 동기에 대한 부씨 주장에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밝혔습니다. 부씨는 ‘무고녀’가 되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1년 6개월 만에 대법원은 항소심을 완전히 뒤집습니다. 대법원은 무고죄가 성립하려면 신고 사실의 진실성을 인정할 증거가 없다는 것을 넘어 신고 사실이 허위 사실이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증명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부씨가 A씨에게 기습키스를 당했다고 신고한 점을 입증할 증거가 부족하다는 것을 넘어서 이것이 허위 사실이라는 것을 검사가 적극적으로 증명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대법원은 ▶부씨가 A씨와 다른 신체접촉을 했다거나 ▶부씨가 주변에 도움을 요청했는지 등은 부씨가 A씨로부터 일순간 기습추행을 당했는지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기 때문에 고소 내용이 허위 사실이라고 증명하지 못한다고 봤습니다. 또 “A씨에 대해 불기소처분이나 무죄판결이 나왔다고 해도 그 자체는 무고의 적극적 근거가 될 수 없다”고 썼습니다.

오히려 대법원은 강제추행에는 ‘기습추행’도 포함된다며 부씨가 쓴 고소장 내용은 당일 A씨로부터 기습추행을 당했다는 취지로 볼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특히 A씨가 사건 직후 부씨에게 보낸 문자메시지나 A씨 주장의 신빙성 등을 볼 때 “부씨가 기습추행을 당했다는 것이 객관적 진실에 반하는 허위 사실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짚었습니다.

신체 접촉이 있었다고 해서 입맞춤까지 동의한 것은 아니라는 점도 명확히 했습니다. 부씨는 신체의 자유와 자기결정권을 가지는 주체고 언제든 그 동의를 번복하거나 동의를 넘는 신체 접촉은 거부할 수 있다는 겁니다.

대법원 3부(주심 이동원 대법관)는 11일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파기환송했습니다. 국민참여재판이 상고심에서 파기되는 건 흔한 일은 아닙니다. 대법원에 따르면 2014년부터 2018년까지 국민참여재판으로 대법원에 올라온 사건 413건 중 파기된 건은 9건으로 파기율이 2%에 그쳤습니다.

항소심부터 이 사건을 맡아온 이은의 변호사는 “일부 신체 접촉을 강하게 거절하지 않았다고 그 이상도 허용된 것으로 여기는 뿌리 깊은 편견이 법원 내에도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줬고, 또 이를 바로잡은 사례”라며 “성폭력 피해에도 증거 부족으로 무고로 몰릴까 주저하는 피해자들을 위해 법원도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긴 소송 과정에서 부 씨는 A씨와 같은 직장을 다닐 수 없어 처음으로 취업했던 직장을 그만뒀습니다. A씨 부인은 소송 중 극심한 스트레스로 임신 8년 만에 얻은 31주 된 아이를 유산했다며 재판부에 탄원서를 내기도 했습니다.

부씨와 A씨는 다른 소송에도 엮여 있습니다. A씨와 A씨 부인은 부씨를 상대로 1억 5000만원 상당의 손해배상 소송을 냈고 부씨도 1억7000만원 상당의 반소를 냈습니다. 앞으로 파기환송심과 대법원 확정판결을 받더라도 이들의 소송은 쉽사리 끝날 것 같지 않아 보입니다.

부씨측 김용원 변호사는 “1심에서 A씨와 부씨만 증인으로 신문하고 부씨의 남자친구 등 정황을 상세히 설명할 다른 이들의 증언은 듣지도 않았다”며 “처음부터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 잘 살폈다면 이렇게 재판이 길어지진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부씨 역시 “항소심도 증인 신문 없이 피고인 신문만 했다”고 아쉬워했습니다. 부씨와 A씨사이 지난한 소송의 첫 단추는 어디서부터 잘못 꿰진 걸까요.

이수정 기자 lee.sujeong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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