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 송미옥의 살다보면(96)
일요일인데 지인에게서 차 한잔할 수 있냐며 전화가 왔다.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바로 약속장소에서 만나 점심을 먹었다. 그의 남편은 서울서 대수술을 받고 내려와 있고 본인도 정성을 다해 병간호하는 중인데 얼굴에 피곤함이 쌓여있다. 밥을 잘 먹어야 간병인이 기운 난다며 염소 전문 식당으로 갔다.
식사 후 한 시간여를 요즘 힘들었던 이야기도 하며 분위기 있는 찻집에서 차 한잔하고 있는데 무심코 휴대폰을 들여다보니 부재중 전화가 열 통이 넘게 와 있었다.
아뿔싸! 미사 중 무음으로 해놓고 그만 잊고 있었던 거다. 119, 112, 경찰서 등등 신원이 확실한 관공서랑 별별 번호가 다 적혀 있다. 자동차도 아파트 주차장에 잘 주차되어 있고 나도 별일 없이 여기서 차 한잔하고 있는데 뭔 일이란 말인가?
폰을 보는 사이 또 전화가 빤짝거렸다. 받으니 경찰이다. 사연인즉, 내 차 안에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나서 아이들이 나에게 전화를 했는데 전화를 안 받으니 경찰서에도 하고, 119에도 하고, 아빠에게, 엄마에게, 온통 연락해서 고양이를 살리겠다고 난리가 난 것이다.
후유~ 한숨을 쉬며 나는 집고양이도 안 키울뿐더러, 동물을 차에 태워 다니지 않는다며 이해를 구하니 신고가 되고 접수가 된 거라 차주가 차 문을 열고 확인을 해야 한단다. 경찰도 현장에 가서 보고 이야기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냥 아이들 장난 전화로 받아들여서 나에게 빨리 조처를 하라는 식이다.
커피가 나오고 한 모금을 마시려는데 또 전화가 왔다. 이번엔 아이 아빠다. 고양이를 살려달라고 아이들이 열 명이 넘게 모여 성화를 해서 내려와 보니 내 차의 앞부분에서 나는 소리가 맞는단다. 어른이 들어봐도 살려달라는 울음소리라는 것이다.
커피를 마시다 말고는 일어나 아파트 주차장에 달려오니 초등학생들과 몇몇 부모가 나와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뭔 일이래? 분명히 내 차에서 나는 소리다. 어찌나 세게 울음소리를 내는지 아이들이 안절부절못하고 애가 탔으리라 짐작이 갔다. 차 문을 열고 찾아도 없다. 한 아이 아빠가 보닛 커버를 열어 여기저기 살펴보니 새끼고양이가 미로 같은 통로에서 벨트에 제 몸을 꼬아서는 오도 가도 못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주먹만 한 놈인데도 야생으로 자라 사람의 손길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나무 꼬챙이로 유도해도 으르렁거리며 방어하는 모습이 귀엽다 못해 웃음이 난다. 저 어린 것의 유랑자 같은 삶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니 한편으론 마음이 스산했다.
시간은 흐르고, 연륜 있는 한 어른이 슈퍼에 달려가 냄새나는 오징어포를 사와서 차 밑으로 유도하니 꼬인 벨트를 스스로 풀고 내려온다. 아이들이 손뼉을 치는 사이 고양이는 오징어포를 잽싸게 낚아채서는 쏜살같이 어디로 사라졌다. 허무하게….
아이들에게 정말 착한 일을 했다며 칭찬을 하고 얼음과자라도 사 주려고 하니 한 아이 아빠가 어느새 아이스크림을 잔뜩 사와서 아이들에게 쭉 나눠주었다. 어린아이들이 장난 전화를 했다고 잠시 무시한 것을 진심으로 반성했다.
사람도 살다 보면 죽을 만큼 힘들어 스스로 생을 마감할 생각을 하고, 또 혼자서 힘든 상황을 이겨내려고 할 때가 있다. 그땐 자존심이고 뭐고 다 뒤로 미루고 크게 아프다고 울어보라고 말하고 싶다. 인생이란 살고 보는 게 우선 아니겠는가? 울 때 옆에서 함께 울어주고, 손잡아 주고, 기댈 수 있게 어깨를 내어주는, 좋은 이웃이 꼭 있다.
그래도 살면서 힘들 때 밥 사주는 사람이 가장 좋은 것 같다. 아픈 사람은 아파서 아프지만 지켜보는 사람도 아프고 힘들다. 지인은 그날 내가 염소고기 사준 것에 감동했다며 마음을 알아주니 요즘은 힘이 하나도 안 든단다. 밥 한 끼 함께하고 좋은 사람 축에 끼어서 행복하다.
오늘 신문엔 홀로 외로이 죽은 시신이 두 달이나 지나 발견되었다는 뉴스가 올라와 있었다.
송미옥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