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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 문화유산에서 세계유산된 '한국의 서원' 9곳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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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서원. 퇴계 이황이 제정한 제향의례의 절차를 철저하게 지켜 한국 서원 제향의 정형을 이룬다. [사진 문화재청]

도산서원. 퇴계 이황이 제정한 제향의례의 절차를 철저하게 지켜 한국 서원 제향의 정형을 이룬다. [사진 문화재청]

6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된 '한국의 서원' 9곳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사립 교육기관이자 성리학 학교. 각 지역 지식인들이 이름난 학자를 사표로 삼아 제사를 지내고 기리는 제향 활동, 학습과 토론 등 강학 활동을 펼쳤다. 이를 통해 학맥을 형성했고, 중앙정부에 만인소 등 여론을 전하기도 했다.

각 지역 지식인 주도로 세운 교육기관 #대표적인 학자 기리는 제향 기능 겸해 #절제된 장식에 자연친화적 건축 구현 #삼국사기, 노비 족보 등 사료도 풍부

수난도 겪었다. 임진왜란 때 의병 거점이 된 서원은 일본군에 불태워져 다시 재건되기도 했다. 한때 당쟁과 붕당 정치의 온상이란 비판도 받았다. 조선말기 흥선대원군은 전국 47곳만 남기는 서원 철폐 정책을 펼쳤다. 9곳의 서원은 대부분 이런 훼손을 피하며 멀게는 500년 가까운 역사를 이어왔다.

건축적 특징도 뚜렷하다. 제향 공간과 강학 공간을 구분하고, 화려함 대신 성리학적 이상을 추구하며 입지·배치부터 자연과의 조화를 꾀했다. 옛 서적과 시문은 물론 방명록, 강의록, 심지어 소유한 노비 족보 등도 전해져 서원의 활동과 운영방식을 짐작하게 한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최초의 서원, 한국 성리학 기원 안향 기려 

◆소수서원(경북 영주)=1543년 건립된 한국 최초의 서원. 죽계천을 둘러싼 경관이 수려하다. 건축물 대부분이 죽계천 서쪽 편에 있어 건너편 연화봉을 자연스레 조망할 수 있다.

중종 때 풍기군수 주세붕은 한국 성리학의 기원으로 꼽히는 고려시대 학자 안향을 기리기 위해 지역 사림과 함께 ‘백운동서원’을 만들었다. 이후 퇴계 이황의 건의로 명종 임금이 직접 ‘소수서원’이라는 현판 글씨를 써서 내렸다. '소수'는 이을 소(紹), 닦을 수(修), ‘유학을 다시 이어 닦게 하라’는 뜻.

소수서원, 한국 최초의 서원으로, 강학과 제향에 관한 규정 역시 최초로 제시했다. [사진 문화재청]

소수서원, 한국 최초의 서원으로, 강학과 제향에 관한 규정 역시 최초로 제시했다. [사진 문화재청]

소수서원의 제항의례는 ‘도동곡’을 부르는 것이 특징. 주세붕이 서원 창건 당시 지은 노래로, 성리학이 한국에 전래한 경위와 안향의 업적을 찬양하는 내용이다. 제향의례에 제향 인물과 연관된 노래가 포함된 것은 한국에서도 유일한 사례다. 방명록인 ‘심원록’에는 방문자들 이름·출신·관직 등이 구체적으로 적혀 있어 당시 서원의 활발할 교류활동을 보여준다.

퇴계 학맥의 총본산, 성리학 학술의 전당

◆도산서원(경북 안동)=학술·정치·사회적으로 큰 상징적 영향력을 발휘했다. 퇴계 이황이 1560년 건립한 도산서당, 이듬해 만든 기숙사 농운정사를 모태로 그 제자들과 지역 사림들이 건립했다. 낙동강과 평야를 바라보는 건물은 자연친화적인 건축인 동시에 성리학적 공간으로서 간소한 장식을 구현했다. 도산서원 현판은 한석봉의 글씨로, 선조가 내려준 것이다.

사림 문학의 대표적인 교류처이자 창작처이기도 했다. 도산서원 주변 경관을 주제로 한 시문이 3000편 이상 전해진다.

도산서원. 퇴계 이황을 기려 그 제자와 지역 사림들이 건립했다. [사진 문화재청]

도산서원. 퇴계 이황을 기려 그 제자와 지역 사림들이 건립했다. [사진 문화재청]

도산서원은 이황을 잇는 사상적 학맥의 총본산이었다. 토론을 중심으로 강학 활동을 펼쳤고, 다양한 철학적 논쟁들을 거쳐 학파의 통일된 의견을 이끌어냈다. 이런 과정이 강회록에 세세하게 기록돼 있다. 공론 활동으로 만인소를 작성, 중앙에 알리기도 했다. 조선판 국민청원 격인 만인소는 재야 지식인들이 연명해서 왕에게 올린 청원서. 1855년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존해 달라는 ‘사도세자 추존 만인소’가 도산서원 소장품이다.

1792년에는 경상도 유생들을 위한 과거가 열려 7000여 명이 응시했다. 이를 기념하는 시사단(試士壇)을 1796년 강변의 소나무 숲에 세웠다.

만대루 7칸 너머 병풍 같은 풍광 

◆병산서원(경북 안동)=서애 류성룡(1542∼1607)의 학문과 정신을 기리는 서원으로 1613년 건립됐다. 최고위직인 영의정까지 지낸 류성룡은 지역 사림이 중앙 정책의 핵심적 위치로 발돋움한 ‘관료형 사림’의 전형으로도 꼽힌다.

병산서원의 모태는 고려 홍건적의 난 때 피난왔던 공민왕의 후원으로 성장한 병산서당이다. 풍산읍에 있던 서당은 1572년 류성룡이 인근 지방관을 역임하던 시절, 현재의 병산서원 자리인 풍천면으로 이전했다.

병산서원. 간결한 사원 건축을 자연 경관에 조화롭게 배치한 탁월한 사례로 꼽힌다. [사진 문화재청]

병산서원. 간결한 사원 건축을 자연 경관에 조화롭게 배치한 탁월한 사례로 꼽힌다. [사진 문화재청]

만인소를 조선시대 최초로 작성한 서원으로, 조선왕조실록 등에도 조정에 유소(儒疏, 유생이 올리는 상소문)를 올린 기록이 여러 차례 나온다.

류성룡의 저작들을 지속적으로 펴낸 곳이기도 하다. 1633년에는 『서애선생문집』초판본을, 1647년에는 『징비록』을 간행했다.

건축물, 특히 누각 만대루는 인간이 만든 서원과 자연을 잇는 명품 건축으로 꼽힌다. 맞은편 병산과 낙동강이 펼쳐내는 풍광은 만대루 7칸이 만들어내는 ‘시각적 틀’ 덕분에 더욱 극적으로 구현된다.

국보급 '삼국사기'에 글씨·서적 4천여점

◆옥산서원(경북 경주)=중종 때 성리학자이자 ‘동방 5현’의 하나로 추앙받는 회재 이언적(1491~1553)을 기리는 서원. 선조 때인 1572년 화개산ㆍ자옥산ㆍ무학산ㆍ도덕산 등 4개의 명산이 에워싼 명당에 건립됐다. 옥산서원 현판은 추사 김정희, 강당 ‘구인당’과 2층 누각 ‘무변루’의 현판은 한석봉 글씨다.

옥산서원. 사원 건축 최초로 도입한 누마루는 자연친화적 경관 구성을 극대화하는 효과가 있다. [사진 문화재청]

옥산서원. 사원 건축 최초로 도입한 누마루는 자연친화적 경관 구성을 극대화하는 효과가 있다. [사진 문화재청]

누마루를 처음 서원에 도입했다는 점에서 건축사적 가치도 크다. 무변루가 중심이 되는 진입부, 강당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강학부, 사당이 중심이 되는 제향부 및 부속사 등 4개 영역이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법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건축사학자 김봉렬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은 “흔히 나타나는 건물 사이의 어긋남도 없이, 문집판각을 제외하고는 모든 건물들이 직각과 평행으로 만나고 있다. 그러면서 공간의 짜임새나 스케일이 너무 고급스럽다”고 평했다.

문화재도 많다. 국보 지정이 예고된『삼국사기』완본 9권(보물 525호)이 대표적. 이언적의 친필과 저서 등 명인들 글씨와 문집 4000여 점도 소장하고 있다. 그 중 ‘복제개혁 반대 만인소’는 고종 때인 1884년 내려진 복식 제도 간소화 정책을 비판하며 8849명이 연명한 상소다.

이론보다 사람됨 중시한 김굉필 

◆도동서원(대구 달성)=앞에는 낙동강이 흐르고, 뒤에는 대니산이 서 있다. 한 마디로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입지다. 한눈에 펼쳐지는 낙동강 전경을 확보하고자 가파른 비탈에, 남향 아닌 남서향에 건물을 배치한 것도 파격이다.

도동서원은 예학 연구의 대표 인물인 김굉필과 정구를 기리는 사원이다. [사진 문화재청]

도동서원은 예학 연구의 대표 인물인 김굉필과 정구를 기리는 사원이다. [사진 문화재청]

건립을 주도한 정구(1543~1620)는 17세기 예학 연구의 대표 인물. 실천윤리를 중시한 김굉필(1454~1504)의 외증손으로 이황과 조식의 학문을 이어받은 당대의 대학자다. 풍수지리에도 해박했다. 지방관으로 부임하는 고을마다 지리지를 편찬할 정도였다. 비탈에 선 도동서원의 특별한 터 잡기도 정구의 안목 덕분으로 보인다.
이곳에는 400살이 족히 넘는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있다. 그 뒤에는 서원 안팎을 구분 짓는 수월루(水月樓)가 있다. 한수조월(寒水照月), ‘찬 물에 달이 비친다’는 뜻. 수월루에 선 유생들은 낙동강에 비친 달을 보며 마음을 쉬게 했을 터.
강학 공간인 중정당 앞뜰은 나무나 풀이 없다. 그냥 흙바닥이다. 유생들이 마음을 비우고 공부에 집중토록 하기 위함이라고도 한다. 중정당 대청마루에 서면 그 이유가 단박에 보인다. 뜰에 나무가 없는 덕분에 낙동강과 먼 산의 풍경이 그림처럼 들어온다.

도동서원의 강학 공간인 중정당(中正堂) 앞뜰은 나무나 풀이 없이 그냥 흙바닥이다. 유생들이 마음을 비우고 공부에 집중토록 하기 위함이라고도 한다. 중정당 대청마루에 서면 그 이유가 단박에 보인다. 뜰에 나무가 없는 덕분에 낙동강과 먼 산의 풍경이 그림처럼 들어온다.

도동서원은 실천 지성과 안민의 실용을 추구한 학술문화 공간이다. [사진 문화재청]

도동서원은 실천 지성과 안민의 실용을 추구한 학술문화 공간이다. [사진 문화재청]

사당 내부에 그려진 두 장의 그림도 매력적이다. 하나는 ‘강심월일주(江心月一舟)’, 달빛 아래 낚싯배 떠가는 밤 풍경과 눈밭에 선 소나무 가지에 둥그런 달이 걸려 있는 풍경. 김굉필의 시에서 따왔다. 하늘과 사람이 하나 되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을 상징한다. 또 하나는 추운 겨울에도 푸름을 자랑하는 ‘설로장송’. 김굉필의 올곧은 정신, 곧 도동서원의 정신을 표현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김학수 교수는 “김굉필은 이론보다 사람됨의 실천을 강조한 소학(小學)을 중시했다. 별명이 ‘소학 동자’였다. 도동서원은 실천 지성과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안민의 실용을 추구하는 학술문화 공간”이라고 설명했다.

'최소한의 건축'으로 기준 세워

◆남계서원(경남 함양)=1552년에 건립된 한국의 두 번째 서원. 서원의 운영과 건축배치의 전형을 구축해 이후 많은 서원의 기준이 됐다.

남계서원은 우리나라에 세워진 두 번째 서원이다. 서원 운영과 건축에 있어 다른 서원들의 전형이 되었다. [사진 문화재청]

남계서원은 우리나라에 세워진 두 번째 서원이다. 서원 운영과 건축에 있어 다른 서원들의 전형이 되었다. [사진 문화재청]

주향 인물 정여창(1450~1504)은 함양 출신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 중앙 관료의 훈구 중심적 성향에 맞서 성리학에 기반한 입장을 견지하며 정치활동을 했다. 이는 사림이 정치에 참여하는 하나의 유형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일본의 침입에 맞서 경상남도 일대의 의병 활동을 주도한 근거지였다. 1595년 일본군에 의해 불타버렸다. 함양 사람들은 전쟁 이후 1603년 곧바로 남계서원을 재건했다.

건축 공간은 다른 서원에 비해 규모가 작지만, 서원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를 완벽하게 갖췄다. ‘최소한의 공간 구성’은 1칸의 온돌방과 1칸의 누마루로 구성된 재사 공간에서 대표적으로 엿볼 수 있다.

남계서원은 서원의 건축 규모가 작다. 그렇지만 서원의 구성 요소는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사진 문화재청]

남계서원은 서원의 건축 규모가 작다. 그렇지만 서원의 구성 요소는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사진 문화재청]

인지상정(人之常情)의 '상정'에 충실했던 김인후

◆필암서원(전남 장성)=왕의 스승이기도 했던 김인후(1510~1560)를 기려 1590년에 건립됐다. 그는 성리학 이해에 진전을 가져온 인물이자 도학과 절의, 문장과 인간애를 겸비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필암서원은 16세기 조선의 엘리트 지성이던 하서 김인후를 기리는 사원이다. [사진 문화재청]

필암서원은 16세기 조선의 엘리트 지성이던 하서 김인후를 기리는 사원이다. [사진 문화재청]

전남 지역에서 서원을 주도하는 서원으로 자리잡았다. 임진왜란 때 전남의 사림이 결성한 의병활동 중심지로도 기능했다. 당시 불타버렸고, 지역 사림들이 1624년 재건했다.

뒤편에 야산을 등지고, 앞쪽에 평야가 펼쳐져 있다. 누마루 확연루에선 탁 트인 경관을 감상할 수 있다. 평지에 자리한 필암사원의 창의적 건축은 이후 평지형 서원 배치의 전형이 되었다.

필암서원은 도학과 절의, 문장과 인간애를 겸비한 김인후의 정신을 기린다. [사진 문화재청]

필암서원은 도학과 절의, 문장과 인간애를 겸비한 김인후의 정신을 기린다. [사진 문화재청]

서원의 재정적 운영방식이 정립되는 단계를 보여주는 노비안, 양안 등 기록물도 전해진다. 서원 소유 논밭의 규모와 소출량 등에 대한 내용도 있다. 특히 '노비보'는 서원 노비의 명단과 계보도로, 한국에 존재하는 유일한 노비 족보로 꼽힌다.

조선 뛰어넘는 글로벌 인재의 육성처 

◆무성서원(전북 정읍)=임진왜란 이후 광해군 7년(1615년)에 세워졌다. 주향 인물은 신라의 최치원과 조선의 신잠(1491~1554). 모두 이 고을 수령으로 부임해 각별한 선정을 베풀었다.

무성서원은 조선을 뛰어넘는 글로벌 인재의 육성처를 지향했다. [사진 문화재청]

무성서원은 조선을 뛰어넘는 글로벌 인재의 육성처를 지향했다. [사진 문화재청]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유학하며 18세에 과거 급제, 벼슬을 한 뒤 29세에 신라로 돌아온 대학자. 처음의 의욕과 달리 6두품 출신인 그는 진골 중심의 독점적 신분구조에 한계를 느꼈고, 중앙에서 벗어나 지방관직을 택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김학수 교수는 “무성서원은 골품제라는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고 글로벌 인재로 성장한 최치원을 기리는 서원”이라며 “조선을 뛰어넘는 글로벌 인재의 육성처란 의미가 담겨 있다”고 말했다.

신잠은 신죽주의 증손자. 고을 사람들이 선정을 베푼 그의 유임을 중앙정부에 청해 6년간 현감을 지냈다. 흉년 때도 수천 명을 구휼했다.

무성서원은 골품제라는 극한의 태생적 한계를 극복한 최치원을 기리고 있다. [사진 문화재청]

무성서원은 골품제라는 극한의 태생적 한계를 극복한 최치원을 기리고 있다. [사진 문화재청]

일제감정기 1906년에는 74세의 최익현이 무성서원을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을사늑약 이후 호남지역 최초의 의병이었다. 최익현은 대마도로 유배당해 옥사했고, 제자 임병찬은 고종의 밀명으로 전국적 의병 전쟁을 준비하다 발각돼 거문도로 유배된 뒤 순국했다. 지금도 무성서원 강수재 앞쪽에 의병 정신을 기리는 ‘병오창의기적비’가 세워져 있다.

'예(禮)'로운 개인과 품격 있는 나라

◆돈암서원(충남 논산)=17세기 조선의 예학 연구를 이끌었던 김장생(1548~1631)의 덕을 기리고자 인조 때인 1634년 건립했다. 김장생은 율곡 이이의 사상과 학문을 잇는 예학의 대가. 예학을 통해 ‘예(禮)로운 개인’과 ‘품격있는 나라’를 지향하며 후진 양성에도 큰 힘을 쏟았다. 김장생 생전의 강학처인 양성당에서 비롯돼, 훗날 현종이 ‘돈암’이라는 현판을 내렸다.

돈암서원은 예학을 통해 '예로운 개인과 품격 있는 국가'를 되기를 지향했다. [사진 문화재청]

돈암서원은 예학을 통해 '예로운 개인과 품격 있는 국가'를 되기를 지향했다. [사진 문화재청]

예학은 성리학의 실천 이론으로, 돈암서원은 이를 한국적으로 완성한 거점이다. 서원 또한 예학을 한국적 건축언어로 재해석했다. 각 현판은 예(禮)와 관련된 다양한 의미들로 구성돼 있다. 김장생의 제자로 추가로 배향된 김집, 송준길, 송시열은 서인 학맥의 형성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돈암서원은 예학의 실천공간으로서 서원의 형식을 크게 혁신했다. [사진 문화재청]

돈암서원은 예학의 실천공간으로서 서원의 형식을 크게 혁신했다. [사진 문화재청]

충남의 중심 서원으로, 이 지역 많은 서원에서 건축양식·교육양식·연구 경향 등 돈암서원과 닮은 점이 확인된다. 예학의 실천공간으로서 서원 형식을 크게 혁신했다. 대표 사례가 강당 응도당. 전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집으로, 현존하는 서원 강당 건축 중에 가장 규모가 크다.

이지영 기자 jylee@joongang.co.kr
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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