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깨 겯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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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언제부터인가 대학가의 일부 운동권에서 나오는 간행물을 접하면 등골이 서늘해지는 경우가 있다. 독재가 어떻고, 미제가 어떻고 하는 투쟁적인 내용 때문만도 아니다. 그들이 쓰는 용어와 문장이 너무나 살벌하고, 또 생소하기 때문이다. 한 예를 들어보자.
『통일에 대한 열망이 4·19이후에 6·10, 8·15 등 청년학생들의 열혈적 투쟁을 시발로 봇물 터지듯 터져…각계 각층에서 의연히 떨쳐 들어간 애국의 정신이 드높았던 한해였다.……』
여기서 「열혈적」이란 표현은 우리가 흔히 쓰지 않는 말이다. 그래서 「봇물 터지듯」이나 「의연히 떨쳐 들어간」 같은 말과 연결될 때 어딘가 선동적이고 투쟁적인 냄새가 물씬 난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이들 용어는 북한에서 일상적으로 쓰는 말들이다.
엊그제 신문을 보면 평축에 참가했던 임수경 양이 판문점을 통해 김상협 대한적십자사 총재에게 보낸 편지 문장도 어딘가 생소한 느낌을 준다. 『통일을 위해 이미 결사의 각오로 북행길을 떠나왔던 점은 판문점을 통과하여 남행길을 다그치려는 그 뜻을 죽어서도 버릴 수 없으며……』 운운하는 내용과 함께 「각이한 계층」 「어깨 겯고」 같은 표현을 쓰고 있다.
「각이하다」는 말은 우리말 사전에도 나오는 말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 「각 계층」으로 쓴다. 「다그치다」는 말도 역시 우리말 사전에 나오지만 북한에서는 보다 광범위하게 사용하고 있다.
우리말 사전에는 「겯다」로만 나오는 「어깨 겯다」라는 말은 북한의 사전을 들쳐보면『①어깨를 나란히 대고 그 우에 서로 손을 올려놓다. ②「행동을 서로 같이 함」을 이르는 말』로 풀이하고 있다. 바로 며칠 전 TV화면에 비친 임 양과 문 목사의 어깨동무가 그것이다.
불과 한달 전에 임 양이 가족에게 남겨놓고 간 편지의 문틀하고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그러고 보면 임 양의 이번 편지는 스스로 쓴 게 아니라 북한당국이 써준 게 틀림없다.
어떤 조류학자의 조사에 따르면 한반도에 분포하고 있는 조류 3백93종 가운데 절반 가까이가 남북한간 서로 이름이 다르다고 한다. 그것은 비단 조류에 국한된 문제만이 아닐 것이다.
분단 40여 년의 세월을 지나는 동안 남북한간 언어의 이질화는 이처럼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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