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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하다]국고보조금 연 58조 배분…“대형마트를 구멍가게식 관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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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아버지가 장가간 다 큰 아들 병원비, 교통비 등 생활비를 일일이 간섭하는 꼴.” (이원희 한경대 행정학과 교수)
“복잡한 시스템 때문에 하부로 내려가면서 누수가 매우 심하다.” (고경환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선임연구위원)
“구멍가게 시스템으로 대형 마트 물동량을 관리하는 희한한 체제.” (이재원 부경대 행정학과 교수)

전문가들의 개혁 방안 제언 #올해 58조원, 보조금 없으면 지방 행정 마비 #시급하지 않아도 “우선 따자” 경쟁 치열 #39개 부처는 '칸막이 운영'…중복·유사사업 많아 #보조금 권한은 중앙정부에…지자체 통제수단 지적 #"중앙정부와 지자체간 재정 역할 단순화 필요"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한결같이 “바꿔야한다”고 말하는 이것. 바로 국고보조금제도다. 국고보조금은 지방자치단체 재정 수입의 15~30%를 차지하는 주요 재원이다. 올해 중앙정부에서 지자체로 교부되는 돈만 58조원. 이 돈이 없으면 지방 행정은 당장 마비된다. 그런데 국고보조금이 되레 ‘지방분권의 걸림돌’이라는 지적을 받는다. 왜일까.

국고보조금은 지자체장이 중앙부처 장관에게 신청한 후 받아들여지면 정부 예산안에 반영되는 구조다. 이 과정에서 지자체의 치열한 경쟁이 벌어진다. 시급하지 않아도 ‘우선 따놓고 보자’는 지대 추구 현상이 극심하다. 이 과정에서 지역 간 국고보조금 불균형도 발생한다. 윤영진 계명대 명예교수는 “(이런 구조 때문에) 중앙정부는 지방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활용하고, 지방정부는 중앙정부에 의존하는 반 분권적 정서가 강하다”고 지적했다.
행정 낭비도 심하다. 국고보조금은 39개 중앙부처가 칸막이를 치고 따로따로 예산을 잡아 운영한다. 중복·유사사업이 많을 수밖에 없다. 더욱이 한 부처가 243억원짜리 국고보조사업을 243개 광역·기초단체에 1억원씩 교부한다고 가정했을 때, 지자체가 각각 신청해야 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행정절차도 243번이 된다. 이원희 교수는 “중앙·지방정부가 쓸데없는 행정 비용을 쓰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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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을’처럼 굳어진 의사 결정권도 문제다. 지난해 지자체는 전체 국고보조사업 비용 중 33%를 분담했다. 예년보다 줄었다지만, 의무적으로 부담한 비용만 지난해 23조원에 달한다. 하지만 어떤 국고보조사업을 하고, 지방에 얼마나 지원할지를 정하는 국고보조율은 중앙정부 마음이다. 한 기초단체 관계자는 “정부가 지방을 국고보조금 위탁 기관, 산하기관 정도로 여기는 게 문제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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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 체계도 허술하다. 기획재정부 내에 보조금 예산을 편성하고 집행·관리하는 국고보조금관리위원회(정부 관료 12명, 민간위원 12명)가 있지만, 법률이 아닌 시행령에 의해 설치된 기구다. 위원장은 장관이 아닌 기재부 차관이 맡고 있다. 국고보조금에 대한 정부의 인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국고보조사업이 지자체에 부담이 되는지를 심의한다고 만든 국무총리실 산하 지방재정부담심의위원회는 사실상 유명무실하다. 국고보조금 컨트롤 타워가 없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문재인 정부는 연방제에 준하는 지방분권을 국정과제로 내세웠다. 여기엔 중앙정부가 받는 국세를 줄이고 지방세를 늘린다는 약속과 함께, 국고보조금 제도를 정비하겠다는 계획이 포함돼 있다. 이원희 교수는 그러나 “국고보조금 개편 논의는 무성하지만 이를 밀고 나갈 추진체가 없다”며 “노무현 정부 때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회 같은 강력한 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국회도 손을 놓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20대 국회 들어 보조금관리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22건 발의됐지만, 국회를 통과한 것은 0건이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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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연 서울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오히려 지역 불균형을 야기하는 국고보조금 차등보조율을 정비하고 기능이 유사한 보조사업을 묶어 교부하는 포괄보조제로 전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김정훈 재정정책연구원장은 “중앙정부와 지자체의 보조금 관리망을 하나로 연결해 보조금이 지자체로 전달되는 과정에서의 누수와 비효율성을 최소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재원 교수는 “30-50 클럽(국민소득 3만 달러, 인구 5000만 명 이상) 국가 중 중앙정부가 국민의 생활에 일일이 간섭하는 나라는 한국뿐”이라며 “기초생활보장이나 기초연금, 장애인연금 등은 국가 사무로 전환하고, 주민의 일상생활과 관련된 일자리, 지역개발 등 생활복지는 지방이 전담하는 등 중앙·정부 간 재정 역할을 단순화·이원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원희 교수는 “국고보조금 개혁은 지방분권의, 재정분권의 첫 단추”라고 강조했다.
탐사보도팀=김태윤·최현주·문현경 기자 pin2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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