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고실 「운당여관」헐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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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한국 바둑계의 요람운당여관(서울 운니동 79)이 31년간의 영업을 마감하고 l일 문을 닫았다.
이 여관을 인수한 왕세원산업(대표 박도준)이 여관건물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오피스텔을 짓기 위해서다.
1백50년 전에 지어진 운당여관 건물은 전통한옥으로 지난 58년 원 주인인 국악인(가야금병창) 오계화씨(69·여·예명 박귀희·인간문화재 23호)가 구한말의 세도가 한상옥(6·25때 남북)으로부터 사들여 10개월간의 수리를 거쳐 문을 열었던 여관이다.
한옥 7채에 객실 31개, 대지면적 4백50평인 이 여관은 개업 다음해부터 지금까지 한국 프로바둑의 수많은 명승부가 치러져 바둑명소가 돼왔었다.
59년 국수전도전기 개최이후 지금까지 각종 기전의 타이틀전만도 4백국 이상을 유치, 조남철·김인·조?현 등 한국바둑의 대가들을 배출한 현장이기도 하다.
개업 초창기에는 한국 바둑의 대부 조남철 9단이 제일 많이 찾았고, 이어 김인 9단이 60년대 말까지 단골이었으며, 70년대 들어서는 조9단이 단골로 드나들였다.
게다가 한옥의 그윽한 정취때문에 화가·서예가·작가 등 예술인 손님들도 많았다.
『해방직후 여성국악인 동호회라는 창극단 멤버로 일하면서 모은돈 1억2천만원으로 이 집을 사들여 여관을 개업했었지요』전 주인 오씨의 술회.
여관 이름은 작명가에게 부탁, 운니동의 운자와 집당자를 합해지었었다고.
오씨는 지난 3월 자신이 61년 설립한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서울 석관동 261)의 시설확충을 위해 이 여관을 기증, 학교측이 오피스텔 건설업체인 주 세원산업개발에 매각한 것이다.
이 건물은 원래 구한말 궁중내시가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원래의 건물 6채에 74년 정능에 있던 윤비(순종의 비)의 별장에서 재목·기와 등을 고스란히 옮겨와 지은 것이다.
오씨는 『그 동안 단골손님과 정성들여 꾸민 업소임을 생각하면 가슴 아픈 일이지만 국악계의 후진양성을 위해 여관을 팔게되었다』며 금새 목이 메였다.
이 여관 전 지배인 이종대씨(59)도 『전통 한옥 숙박업소로 외국에 더욱 이름이 알려져 6∼7년 전부터는 일본 NHK-TV가 취재해 가곤 했다』며 『이 때문인지 손님 중 80%정도가 일본인·미국인등 외국인들이었다』고 서운해했다.
세원산업개발은 이곳에 지하 3층, 지상 10층, 연면적 2천2백18평 규모의 월드 오피스텔 건립공사를 91년 2월께 완공예정으로 10일께 착공할 계획.
그러나 일부에서는 운당여관이 전통한옥일 뿐 아니라 비원과 종묘 등 문화재와 인접해 있고 주변에 전통한옥들이 산재해 있으며, 여관 앞 도로도 소형승용차 두 대가 겨우 비껴 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은 골목길인데도 서울시가 이곳에 고층 오피스텔 건축허가를 내주는 처사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지적하고 있다.<제정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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