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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업위기 성대 '책방 풀무질' 새주인 된 청년 4명 독특한 이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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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동안 운영한 책방 풀무질을 폐업한 은종복 풀무질 대표(왼쪽 세번째)와 새로 풀무질을 인수한 전범선(왼쪽부터), 장경수, 홍성환 씨. 전범선 씨 본인 제공

26년 동안 운영한 책방 풀무질을 폐업한 은종복 풀무질 대표(왼쪽 세번째)와 새로 풀무질을 인수한 전범선(왼쪽부터), 장경수, 홍성환 씨. 전범선 씨 본인 제공

“86세대인 은종복 대표(54)가 딱 제 나이 때 책방 풀무질을 인수했습니다. 30년 가까이 흘러 이제 저희가 인수한다는 건 세대가 바뀌는 상징으로 볼 수 있겠죠.”

[2019 대학별곡] 캠퍼스 터줏대감들이 말하는 달라진 대학가 ④ #성균관대 사회과학서점 '책방 풀무질'

폐업 위기에 놓여있던 서울 명륜동 성균관대 앞 사회과학서점 ‘책방 풀무질’이 새 주인을 찾았다. 지난 12일 풀무질에서 만난 새 주인 전범선(28)씨는 “한국에서는 오래된 전통이 촌스러운 것으로 치부되는 것이 아쉽다”며 “완전한 세대교체보다는 세대계승의 모범적 사례가 되고 싶다”며 풀무질 인수 이유를 밝혔다.

인디밴드 멤버 등으로 구성된 새 풀무질 주인들  

풀무질은 1985년부터 성균관대 앞에서 34년째 운영돼 온 ‘터줏대감’ 서점이다. 은종복씨는 1993년부터 책방을 넘겨받아 26년간 운영했다. 하지만 10년 전부터 적자가 쌓여 결국 문을 닫게 됐다.

지난 1월 책방이 경영난으로 인해 인수자를 찾는다는 보도가 나간 후 여럿이 문을 두드렸다. 그중 전씨를 비롯한 장경수(29), 고한준(27), 홍성환(30)씨 청년 4명이 새 주인이 됐다. 은씨는 지난 1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상적인 새 주인의 조건으로 “30대 전후 젊은 남자, 인문사회과학 지식이 있고, 규칙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밝혔다. 4명의 청년은 이 조건에 부합했다.

경영난을 겪던 은 대표는 책방 풀무질을 지하로 옮겼다. [중앙포토]

경영난을 겪던 은 대표는 책방 풀무질을 지하로 옮겼다. [중앙포토]

전씨는 인디밴드 ‘전범선과 양반들’로 활동 중이다. 2014년 1집 앨범 ‘사랑가’로 공식 데뷔했으며 이후 2015년 앨범 ‘혁명가’를 발표했다. 장경수·고한준 씨와 함께 독립출판사 ‘두루미’를 운영하기도 하며 또 다른 친구들과 서울 용산구 해방촌에서 사찰음식 레스토랑을 경영하기도 한다.

특이한 이력만큼 이들은 새 방식의 책방 운영 계획 갖고 있다. 전씨는 “영국 유학 시절 만난 홍성환씨가 회사를 퇴사하고 두루미 대표로 들어와 경영을 담당할 예정이다”며 “수익을 위해 풀무질과 출판사의 콘텐트·큐레이션 협업을 진행하려 한다”고 말했다.

이들은 큐레이션·커뮤니티·콘텐트를 뜻하는 ‘3ㅋ’를 새 운영 모토로 삼았다. 전씨는 ”지금 서가에 출판사별로 책이 꽂혀 있는데 인물·담론 별로 나눠서 큐레이션을 할 예정”이라며 “또한 팟캐스트를 통해서 온라인 큐레이션도 진행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요즘 대세인 오프라인 모임도 활성화할 예정이다. 전씨는 “사일런트 리딩이라고 2시간 동안 조용히 같이 앉아서 책만 읽는 미국의 리딩파티를 도입하고 싶다”며 “그 시간만큼은 정보의 범람으로부터 벗어나 한적하게 책을 읽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덧붙여 “수익화를 위해서 마음에 드는 사람들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공간을 꾸미는 게 우선”이라고 말했다. 풀무질은 약 한 달간 리모델링 후에 다시 문을 열 계획이다.

전씨는 “은 대표님은 우리 세대가 담론에 관심이 적다고 했는데 꼭 그렇지는 않다고 본다”며 “민족해방에 집중하던 과거와 달리 이제 여성ㆍ성소수자ㆍ동물해방과 그 외 환경운동같이 다양하게 분산이 된 것이다. 풀무질을 그런 담론이 자유롭게 논의되는 장소로 만들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제주도로 떠나 제주 풀무질 이어간다는 은종복 전 대표

 지난 1월 만났던 은종복 풀무질 대표. 당시 은 대표는 풀무질을 맡아갈 새로운 주인을 찾고 있었다. [중앙포토]

지난 1월 만났던 은종복 풀무질 대표. 당시 은 대표는 풀무질을 맡아갈 새로운 주인을 찾고 있었다. [중앙포토]

은종복씨는 지난 11일 마지막으로 풀무질에 출근했다. 이날은 은씨의 풀무질이 공식적으로 폐업하는 날이었다. 은씨는 “사람으로 치면 26살 먹은 자녀를 보내는 것인데 어려운 출판 현실에 마음이 좀 무겁기도 하다”며 씁쓸하게 말했다.

은씨는 마지막 날까지도 분주했다. 5만 권의 책이 구비돼있던 서가에는 절반가량 책이 빠진 상태였다. 은씨는 쌓여있는 수십 개의 택배를 정리하면서 “이건 출판사로 돌려보내는 것이고 이건 주문받은 책들이다”며 “다른 택배는 제주도로 보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은씨는 제주도로 이사해 내년 새로운 사회과학서점 ‘제주 풀무질’을 열 계획이다. 은씨는 “책방 26년이 한동안은 감옥 같았는데 이제 제주도로 떠나며 자유로워졌다”고 말했다.

마지막 날이라는 소문을 듣고 풀무질 녹색평론 소모임 멤버부터 성대 학생들까지 단골들이 줄이어 찾아왔다. 성대 글로벌경영전공 김성환(24)씨는 “목적을 갖고 방문하는 일반 서점이나 인터넷 서점과 달리 풀무질에서는 우연히 발견할 수 있는 책을 보며 오래된 전통을 경험하는 곳이었다”며 아쉬워했다.

지난 11일 폐업한 서울 명륜동 성균관대 앞 사회과학서점 ‘책방 풀무질’. 서가에는 책이 절반가량 빠진 상태다. 김혁준 인턴기자

지난 11일 폐업한 서울 명륜동 성균관대 앞 사회과학서점 ‘책방 풀무질’. 서가에는 책이 절반가량 빠진 상태다. 김혁준 인턴기자

새로 대표를 맞게 된 청년들에 대해 은씨는 “네 분은 실용과 합리를 저보다 더 생각한다. 저는 사실 책방을 운영하면 안 되는 사람이었는데, 새 인수자들은 더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인문학을 전공하고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잘할 것이라 본다”며 기대감을 나타냈다.

박해리 기자·김혁준 인턴기자 park.hae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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