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사실 안에 세월의 흔적이 묻은 가격 안내표가 붙어있다. 권유진 기자
“보고서 제목 보니 이건 OOO 교수님 수업이네!”
캠퍼스 터줏대감들이 말하는 달라진 대학가 #?연세대 복사실 아저씨
A4용지에 출력된 과제물의 제목만 봐도 어떤 수업에서 내준 숙제인지 맞히는 대학교의 터줏대감이 있다. 바로 ‘복사실 아저씨’다. 대부분 20년 이상 한 자리를 지킨 ‘복사실 아저씨’들은 매해 열리는 강의 내용에 빠삭해 학생들과 관련 내용에 관해 얘기를 나누기도 한다. 매년 신입생이 들어오고 졸업생들이 사회로 나가는 동안, 이들은 계속 종이와 함께 학교 한 귀퉁이를 지켜왔다.
새학기가 되면 복사실 앞에 ‘스프링 제본’(수업에 필요한 논문을 인쇄해 스프링으로 묶어 한 권의 책으로 만든 것)이 잔뜩 쌓여있고 학생들이 서로의 노트 필기를 복사하려 길게 줄을 섰던 광경에 대해 ‘복사실 아저씨’들은 “이제 그런 것은 다 옛말”이라고 입을 모았다. 저작권 문제가 불거지면서 대학 복사실이 단행본 불법 복제의 온상으로 지적받기도 했으나 요즘은 그마저도 거의 사라졌다.
“복사실 앞에 길게 줄 늘어서던 건 이제 추억”

20여년 째 연세대학교 내 복사실을 지키고있는 전모씨(왼쪽)과 임모씨(오른쪽). 권유진 기자
6일 오후 방문한 연세대학교 한 단과대 건물 지하에 있는 복사실은 한산한 모습이었다. 시험기간을 앞두고 있어 옛날이었다면 한참 학생들로 붐볐을 시기임에도, 복사를 하러 들르는 학생은 거의 없었다.
4~5년 전만 해도 이곳은 수업 자료 PPT를 인쇄하거나 맡겨뒀던 스프링 제본을 찾으러 온 학생들로 시끌벅적했다. 18년째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임모(49)씨는 “요즘 학생들이 태블릿 PC로 PDF 파일을 다운받아 보지 누가 여기서 인쇄를 해서 보냐”며 씁쓸하게 웃었다. 강사나 조교가 웹사이트에 수업 자료를 올리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태블릿PC나 노트북으로 다운받아 보기 때문에 인쇄를 하러 오지 않는다고 전했다. 다만 과제물은 아직 대부분의 학생들이 복사실에서 직접 인쇄해 교수에게 제출한다고 한다.
자연스레 매출도 급격히 감소했다. 임씨는 “매출이 매년 10~15% 줄고 있다”며 “원래 100명 중 90명꼴로 수업 자료를 인쇄했는데 지금은 많아 봐야 100명 중 6~7명꼴이다”고 말했다. 요즘은 외부 자료 제본이나 포스터 작업 등으로 그나마 수입을 유지한다고 했다.
다른 단과대 건물에 있는 복사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이 건물이 생긴 1998년부터 복사실을 운영했다는 전모(54)씨는 “2~3명 있던 직원들은 다 내보내고 나 혼자 하고 있다”며 “몇 년 전보다 찾는 학생들이 3분의 1로 줄었다”고 말했다.
“개인주의 심화한 듯…서로 필기 공유 안 하더라”
임씨는 복사실을 찾는 수요가 줄어든 데는 전자기기가 보편화 된 것 외에 달라진 학생들의 성향도 반영됐다고 봤다. 몇 년 전만 해도 시험 기간이 되면 학생들이 서로의 노트 필기를 복사해서 공부하며 빠진 것이 없는지 확인했는데, 요즘은 이런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고 했다. 임씨는 “학생들이 옛날처럼 필기를 복사해 친구들과 공유하는 분위기는 아니다”며 “개인주의 성향이 강해진 요인도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전씨 역시 “태블릿 PC나 노트북으로 서로 필기 내용을 공유하는지는 몰라도, 필기를 복사하러 오는 학생들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50원도 카드 결제…수수료 부담도

복사실 앞에 항상 놓여져있던 동전통(왼쪽)과 몇년 전 새로 들어온 카드 결제기(오른쪽). 권유진 기자
복사비는 단면 50원 양면 100원이다. 10여 년째 가격은 그대로다. 복사실 앞에 놓여있는 동전통은 복사실의 상징이기도 했다.
몇 년 전, 이 동전통 옆에 카드 결제기가 놓였다. 현금을 사용하지 않는 학생들의 트렌드를 반영한 것이다. 실제 복사실에서 한 시간 정도를 관찰한 결과, 학생 5명 중 4명꼴로 100원~500원의 금액을 카드로 결제했다. “150원입니다”라는 주인의 말에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카드를 내밀었다.
임씨는 “50원도 대부분 카드 결제를 한다”며 “건건이 카드 수수료를 내야 하는데 버거운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졸업생들 찾아오면 반가워” “오래 할 마음은 없어”
학교 복사실에 추억이 있는 졸업생들이 간혹 일을 맡길 때도 있다고 한다. 임씨는 “졸업생들이 교수님을 찾아뵙거나 아이들을 데리고 학교 견학을 올 때 잠깐씩 복사실에 들르기도 한다”며 “그럴 때면 반갑다”고 말했다.
전씨에게 물으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졸업생들이 찾아오면 오면 반갑지. 그래도 앞으로 오래 할 마음은 없어서 다른 일을 찾고 있어. 아쉬워도 어쩌겠냐, 먹고는 살아야지”
권유진 기자 kwen.yuji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