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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네기홀 기부금 비중 38%, 세종문화회관은 겨우 3%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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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0호 08면

공공예술 ‘아트 펀드레이징’ 걸음마

세종문화회관의 ?2019세종시즌? 지프 협찬 캠페인.

세종문화회관의 ?2019세종시즌? 지프 협찬 캠페인.

지난 4월 17일 세종문화회관 중앙대계단에 지프 랭글러가 등장했다. 서울 시민의 문화예술 향유를 위해 세금을 들여 지은 공공 문화시설 한복판을 수입 자동차가 차지하다니, 무슨 일일까.

기업의 예술기관 후원 세계적 추세 #국내 기관은 재원조성 시스템 없어 #신차 출시 행사 등 스폰서십 안간힘 #현대차, 영국 테이트모던과 손잡아 #“성취 있어야 기업서도 매력 느낄 것”

랭글러를 수입하는 FCA그룹이 세종문화회관과 파트너십을 맺고 진행한 신차 출시 행사였다. 세종문화회관 측은 “시민들의 문화예술 향유 기회 확대를 위해 보다 많은 재원이 필요해 기업 스폰서십 유치에 나서고 있다”며 “공간 대여를 넘어 시민 참여 문화 프로그램으로 기획한 협업 형태”라고 설명했다.

세종문화회관의 2018년 기준 총예산액은 539억원으로, 이중 티켓 판매와 대관 등 자체수입은 232억원에 불과하다. 부족분(307억원)은 서울시로부터 출연금을 받아 메우고 있다.

미국 비영리 예술기관 예산 45%가 기부금

현대자동차가 영국 테이트모던 터빈홀 전시를 후원하는 ‘현대커미션’.

현대자동차가 영국 테이트모던 터빈홀 전시를 후원하는 ‘현대커미션’.

지금 문화예술계는 공공기관의 재원조성 다각화가 화두다. 세계적으로 국가의 문화예술 관련 지출이 제한되는 추세인 반면, 국민의 기대 수준은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3월 취임한 유인택 예술의전당 사장의 취임 일성도 “수준 높은 제작극장으로 거듭나기 위해 다각도로 펀드레이징을 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예술의전당의 2018년 기부·협찬 수입은 한화그룹의 ‘교향악축제’ 협찬 등 25억 5000만원으로 전체수입의 7%에 불과하다. 세종문화회관도 BMW코리아의 ‘세종시즌 40주년 파트너십’ 협찬 등 15억 4000만원으로 전체수입의 3%다. 지난해 뉴욕 카네기홀 후원금이 전체수입의 38%인 4110만 달러(약 490억원)로 티켓 판매 수입 1755만 달러(약 209억원)의 2배가 넘는 것과 대조적이다.

미국은 전통적으로 문화예술에 대한 공적 지원이 소극적인 나라다. 비영리 예술기관은 국고 지원을 거의 기대할 수 없다. 1965년 설립된 전미예술기금의 총예산이 95년 절반으로 삭감됐고, 트럼프 대통령은 이 예산의 폐지를 주장하기도 했다. 문화예술기관 및 단체가 적극적인 모금 캠페인을 벌여 예산의 약 45%가 기부·후원금으로 메워진다. 정부 지원금은 평균 5% 미만이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유럽도 경제불황 여파로 정부의 지원이 줄고 있다. 국민에 대한 문화서비스를 국가의 의무로 여기는 프랑스도 2003년 메세나법을 만들어 민간 기부를 장려하고 있다. 베르사유궁에 호텔이 들어서고, 오르세미술관 외벽이 광고판이 되곤 하는 이유다. 프랑스에서 2004년 10억 유로(약 1조 2800억원)였던 기업 후원금 총액은 2012년 30억 유로(약 3조 8400억원)로 3배가 됐다(해외문화홍보원 2019).

영국 정부도 2010년 ‘문화예술정책 개혁안’에서 문화예산을 30%까지 대폭 삭감할 것을 발표하고, 기업 협찬 및 개인 기부를 장려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같은해 국립극장과 로열셰익스피어컴퍼니는 정부지원금이 25%와 15%씩 줄었다. 국립극장이 수익모델 개발을 위해 ‘워호스’ 월드투어와 NT라이브 사업을 시작한 이유다. 현재 바비컨센터와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LSO)가 신축 추진중인 전용홀도 건축 비용을 감당할 네이밍 스폰서를 물색 중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주)파라다이스의 후원으로 지난해 인천서구문화재단이 주최한 ‘원데이 아트 투어’.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주)파라다이스의 후원으로 지난해 인천서구문화재단이 주최한 ‘원데이 아트 투어’.

한정호 공연평론가는 “해외에서는 정부의 지원 예산이 제한된 상태에서 공공예술기관들이 자구책으로 민간 기부로 눈을 돌리고 있다”며 “독립적인 예술생태계 조성을 위해서도 민간 후원 확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국도 1994년 메세나협회가 설립됐고, 현재 237개 회원사가 연간 150억 규모의 지원 사업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지난해 조사에 따르면 10년 미만 지속 사업이 80% 선으로, 장기 파트너십 구축이 요구되는 상황이다.

영국의 현대미술관 테이트모던은 기업과 장기 파트너십 구축에 성공한 대표 사례다. 생활용품 기업 유니레버가 13년간 후원한 터빈홀 전시 ‘유니레버 시리즈’는 미술계 명품 브랜드가 됐고, 지금은 현대자동차가 ‘현대 커미션’이라는 이름으로 이어가고 있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장기 파트너십은 예술기관 쪽에 탄탄한 시스템이 있기에 가능하다. 해외의 예술기관은 대부분 독립된 재원조성 부서에서 전문가들이 세분화된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미국 카네기홀은 재원조성 담당직원이 30명이 넘고,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은 40명이 넘는다. 대대적인 기부 캠페인도 특징이다. 스미소니언 협회는 산하의 19개 박물관·미술관·연구소 등을 통합한 효율적인 기부자 관리시스템을 구축해 2014년 집중 모금캠페인에서 목표액 15억 달러가 넘는 18억 8000만 달러를 달성해 화제가 됐다.

반면 우리 예술기관은 재원조성 시스템이 거의 없는 상태다. 최근 세종문화회관이 ‘아트 펀드레이저’ 3명을 채용해 문화재원팀 가동을 본격화했다. 올 들어 기업 관계자들을 초청하는 ‘파트너십 데이’를 시작했고, 메세나협회와 협력한 문화접대비 활성화 사업 및 30여 개 모금 사업도 동시에 진행 중이다. 5월 말 가구회사 퍼시스 협찬으로 개관한 ‘세종 아티스트 라운지 퍼시스’, 투바앤 후원으로 19일 개관하는 유아 돌봄공간 ‘라바키즈’도 그 성과다. 예술의전당도 최근 사업개발부의 펀드레이징 업무를 강화하고 관련 직원 교육에 나섰다.

소액 기부 늘어 지원 기업수는 7.2% 증가

올해 한화그룹 후원 20주년을 맞은 예술의전당 ‘교향악축제’.

올해 한화그룹 후원 20주년을 맞은 예술의전당 ‘교향악축제’.

한편 메세나협회의 지난해 조사에 따르면 우리 기업의 문화예술 지원 규모는 전년 대비 4.15% 감소했다. 특히 연극·무용 등 공연 분야에 대한 지원은 2년 연속 감소했다. 협회측은 “청탁금지법 시행 이후 협찬 활동 위축과 ‘미르·K-스포츠재단’ 사태 이후 기업의 기부금 집행에 대한 내부 기준 강화” 등을 원인으로 꼽았다.

반면 지원 기업수는 7.2% 증가했다. 소액 지원이 늘어난 것으로, 지원 규모의 부침에도 불구하고 문화예술 지원에 대한 기업의 관심도는 전반적으로 높아지고 있다는 청신호다. 지속 기간 면에서도 10년 이상 장기 사업의 비율이 6.9% 증가하는 등 긍정적 신호를 보이고 있다. 메세나협회 주순이 경영기획팀장은 “우리 기업도 문화예술 지원 활동을 기업경영의 일부분으로 인식하고 사업화하는 전략적 접근이 조금씩 확산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전문가들은 공공기관이 민간 후원을 유치하려면 기업이 끌릴 만한 장기적인 비전 제시가 먼저라고 말한다. 안호상 홍익대 공연예술대학원장은 “해외에서 재원조성이 잘되는 기관은 그 브랜드만으로도 인정받는 곳”이라며 “장기적인 예술적 방향성과 탄탄한 운영이 뒷받침된 확고한 성취가 있어야 기업에서도 매력을 느낄 것”이라고 말했다.

기업과 공공예술기관 파트너십, 정부가 징검다리 돼야

이제승 센터장

이제승 센터장

지난해 서울문화재단은 12명의 시각예술가를 선발해 익숙한 도시 서울과 낯선 도시 베트남 무이네를 여행하며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제작한 작품으로 전시를 했다. 충남문화재단도 뮤지션 9명을 선발해 캄보디아와 공주·부여의 지역축제에 참가하고 지역의 이미지를 개선하는 음원을 제작해 발표했다.

둘 다 하나투어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로부터 각각 2000만원씩 지원받아 진행한 ‘문화예술 희망여행 COA프로젝트’다.

기업과 예술조직의 파트너십 조성에 정부도 나서고 있다. 2014년부터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운영하고 있는 ‘문화예술협력네트워크 지원 사업’이 대표적이다. 공공-민간의 협업 사업을 추진하는 공공 문화재단 및 공공기관에 민간이 후원하는 만큼의 금액을 정부가 매칭펀드 형식으로 지원하는 형태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이제승 문화예술후원센터장은 “문화예술 분야의 기부는 기업과 예술조직의 인식 차가 크기 때문에 매개 역할이 필요하다”면서 “CEO의 취향과 인맥에 의존한 재단 후원금이 기업 예술후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현상황에서 프로젝트별 기업 후원을 늘려가는 것이 네트워크 지원 사업의 과제”라고 말했다.

이런 인식하에 다양한 기업 협찬 모델이 개발되고 있다. 주로 기업이 문화예술을 통해 사회공헌을 실현하는 형태다. 아모레퍼시픽과 서울문화재단이 여성문화 확대를 위해 개최한 ‘여성연출가전’, 벽산엔지니어링과 종로문화재단이 영유아 환아에게 문화향유 기회를 제공하는 ‘어린이병원힐링플레이’, 올림푸스한국과 인천문화재단이 소아암 환아 가족과 함께 도시 탐방과 예술교육을 하는 ‘아이엠카메라 희망여행’ 등이 대표적이다.

‘문화예술후원 우수기관’ 인증사업도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기부 활성화를 위해 주력하는 사업이다. 2015년부터 두산·신세계·신한은행·케이티앤지·포스코·현대백화점·한화생명보험·효성 ·KB국민은행 등이 인증받았다. 지난해 파라다이스·세아홀딩스 등 5개 기업이 새로운 우수기관으로 선정돼, 현재 인증받은 기업은 총 29개다.

이제승 센터장은 “메세나 협회도 있지만 국내 기업수에 비해 가입 기업수가 여전히 적은 상황”이라며 “문화예술 기부 활성화를 위한 정책적 접근이 필요하다. 인증 기업에 대한 인센티브를 확대하는 등 문화체육관광부를 넘어 범정부 차원에서 고민해야 할 문제”라고 강조했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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