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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찬의 인(人)프라] ILO가 좌파? 공산혁명 막기 위해 탄생했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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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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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10월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ILO 첫 총회. [사진 국제노동기구]

1919년 10월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ILO 첫 총회. [사진 국제노동기구]

국제노동기구(ILO) 제108차 총회가 스위스 제네바에서 10일(현지시각) 개막됐다. 21일까지 계속되는 이번 총회에선 설립 100주년을 맞아 ‘인간중심 전략 선언문’이 채택될 전망이다. 향후 100년의 지향점을 담는다.

창립 100주년 되돌아 본 ILO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 원칙 마련 #노조기구 아닌 노사정 협력기구 #1호 협약은 ‘하루 8시간 노동’ #한국은 91년 가입 … 현재 이사국

9일부터 6박 8일 일정으로 북유럽 순방에 나선 문재인 대통령도 지난해부터 ILO 총회 참석을 고려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총회 전에  ILO 핵심 협약 8개 중 비준하지 않은 4개(단결권 보장과 강제노동금지)를 비준하려 애썼다. 이를 발판삼아 문 대통령이 ILO 연단에 올라 자축을 겸한 연설을 할 계획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비준이 무산되면서 어그러졌다. 대신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이 참석했다. 노사단체의 수장들도 제네바에 집결했다.

ILO는 국제기구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참화를 정리하려 체결된 베르사유조약이 토대다. 이 조약은 독일과의 종전 처리 문제만 다룬 게 아니다. 제국주의 전쟁을 억제하고, 공산주의 혁명을 막을 목적으로 각종 기준을 세웠다. 모두 15장 440개 조항이다. 13장(387~427조)에 국제적인 노동동맹과 노동규약이 담겼다. ILO는 이에 근거해 1919년 출범했다.

공산혁명과 노동규약이 무슨 관련이 있을까. 조약 체결에 참여한 국가들은 산업화의 진전에 따라 열악해지는 근로조건을 개선하지 않으면 소련에서와 같은 사회불안과 혁명이 초래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모든 나라가 지켜야 할 국제 노동기준을 제시하게 된 이유다.

국제 노동기준의 핵심은 공정 무역 경쟁이다. 경쟁이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한 나라의 근로조건 저하를 통한 덤핑이 다른 나라의 국제경쟁력에 불이익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게 그것이다.

최근 ILO의 강제노동금지 협약과 관련, 논란이 이는 공익근무나 산업기능요원 같은 대체복무의 협약 위반 여부를 판단하는 잣대도 사실은 공정 경쟁이다. ILO는 이를 생산원가 덤핑으로 받아들인다. 2007년 8월부터 “강제노동협약의 제외 대상이 아니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까닭이다. 박정희 정권 시절 새마을운동도 협약 위반이다. 경제개발을 위해 국민을 동원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출범 당시부터 ILO는 노사정 3자 협력주의를 표방했다. 노동 단체만의 기구가 아니라 노사정 협력기구인 셈이다. 41년 미국 뉴욕과 워싱턴에서 열린 특별 회의에선 “노사정 3자의 실질적 협력은 노동자와 사용자의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적 정치 제도 틀 안에서만 가능하다”고 선언했다. “노동자단체와 사용자단체는 상대방의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는 내용도 담았다. 서로의 권리만 주장하는 것을 부정하고, 협력을 강조했다.

1946년 12월 에드워드 펠런 ILO 사무총장(왼쪽)과 트리그브 할브란 리 유엔 사무총장이 ILO의 전문기구 편입 문서에 서명했다. [사진 국제노동기구]

1946년 12월 에드워드 펠런 ILO 사무총장(왼쪽)과 트리그브 할브란 리 유엔 사무총장이 ILO의 전문기구 편입 문서에 서명했다. [사진 국제노동기구]

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ILO는 필라델피아 선언을 의결했다.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는 베르사유조약 13장의 원칙을 재확인한 의결이다. 완전고용과 생활수준 향상, 기술혁신에 따른 노동자의 직업훈련 필요성, 단체교섭권의 승인, 생산능률의 개선, 사회경제정책의 적용성을 높이기 위한 노사협력의 필요성 등을 강조했다.

ILO의 협약은 총회에서 채택한다. 협약을 비준한 국가는 국제법상 의무를 부과받는 다자간 조약이다. 1호 협약은 근로시간에 대한 규제였다. 워싱턴에서 열린 첫 총회(1919년)에서 하루 8시간, 주 48시간 노동을 협약으로 채택했다.

ILO 협약은 8개의 기본협약과 4개의 우선협약, 177개의 기술협약 등 189개로 구성돼 있다. 이외에 가이드라인 역할을 하는 198개의 권고가 있다. 187개 회원국 중 60%가량이 전체 협약 중 25%(47개) 정도를 비준했다. 80년대 들어 평균비준율은 13%로 더 낮아졌다. 8개 핵심 협약도 전 세계 노동인구의 절반은 적용대상이 아니다(미비준).

1969년 10월 10일 데이비스 A 모스 ILO 사무총장(오른쪽)이 노벨평화상을 ILO를 대신해 받고 있다. [사진 국제노동기구]

1969년 10월 10일 데이비스 A 모스 ILO 사무총장(오른쪽)이 노벨평화상을 ILO를 대신해 받고 있다. [사진 국제노동기구]

그러나 협약을 비준하지 않았더라도 ILO 협약은 국제 기준으로서 역할을 한다. 다만 모든 국가가 일률적으로 지키도록 강제되는 것은 아니다. 국가별 사정에 맞게 적용할 수 있다. 이는 베르사유조약의 일반원칙이기도 하다.

ILO는 국제기준을 만드는 것 이외에 개발도상국가에 대한 기술원조와 교육활동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다. 입법 형성기에 있는 국가에는 ILO가 전문가를 파견해 각종 법·제도 제정과 정비를 돕기도 한다. 57~71년 한국에도 전문가를 파견하고, 250만 달러를 들여 직업훈련원을 운영하는 등 각종 지원을 했다. ILO의 이런 노력은 69년 노벨평화상 수상으로 이어졌다.

한국은 91년 말 남북한의 국제연합(UN) 동시 가입을 계기로 152번째 ILO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96년 3년 임기의 정이사국으로 선출된 이후 2017~2020년 임기의 이사국으로 재선출되는 등 정이사국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한국이 ILO에 내는 분담금은 회원국 중 13위다. 2017년 771만 스위스프랑(약 92억원, ILO 예산의 2.04%)을 분담금으로 냈다. 한국이 비준한 ILO 협약은 핵심 협약 4개를 비롯해 29개다.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wols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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