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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로 이사 온 후 매일 단잠을 잔다, 한적한 한옥의 선물일까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박헌정의 원초적 놀기 본능(31)

2011년 처음 집을 샀을 때의 모습(위)과 최근의 모습(아래). 지은 지 60년 된 집이다. [사진 박헌정]

2011년 처음 집을 샀을 때의 모습(위)과 최근의 모습(아래). 지은 지 60년 된 집이다. [사진 박헌정]

지난달에 전주로 이사했다. 50여년간 서울사람으로 살다가 전혀 연고도 없는 곳으로, 그것도 아이들은 서울에 남겨둔 채, 1톤 트럭에 꼭 필요한 살림살이만 싣고 아내와 둘이 내려왔다. 오래전부터 ‘복잡한 서울을 떠나 한적한 지방 도시에서 살겠다’고 되뇌던 다짐을 실행에 옮겼다.

‘은퇴 후 계획’의 일환이었다. 은퇴 후 마음 편히 지내기 위한 선결 조건은 첫째 건강, 둘째 배우자, 셋째 돈인데, 그 가운데 ‘돈’이 가장 골치 아프다. 노력해도 달라질 가능성이 가장 낮다. 전문가들은 노후에는 돈을 늘리기 힘드니 쓰임새를 줄이라며 ‘작은 집’을 제안한다. 집의 규모뿐 아니라 전체적인 주생활 비용을 줄이라는 의미다.

언제부턴가 나는 수도권을 벗어나 부동산 가격이 낮은 지방으로 옮기면 적은 비용으로 넓고 좋은 공간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쏠리기 시작했다. 서울에 특별한 애정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당연히 ‘은퇴 후 서울 탈출’을 공언하기 시작했다.

낯선 도시에서 처음 경험하는 단독주택 생활에 하루하루가 바쁜 우리 부부와 달리 강아지는 제 세상을 만난 듯 신났다. [사진 박헌정]

낯선 도시에서 처음 경험하는 단독주택 생활에 하루하루가 바쁜 우리 부부와 달리 강아지는 제 세상을 만난 듯 신났다. [사진 박헌정]

처음에는 “그게 사람답게 사는 것”이라며 호응하던 지인들은 내가 그냥 해보는 말이 아님을 알게 되자 “생각은 좋지만 그게 그렇게 쉽겠나?” 했다. 부연설명이 필요했다. “서울은 춥고, 물가 비싸고, 공기도 안 좋다. 서울의 장점은 돈이 많이 몰려있으니 먹고 살기 좋은 것과 아이들 교육환경 아닌가. 그러니 아이들 대학 들어가고 내가 은퇴한 후에는 서울에 미련을 가질 이유가 없다. 이쪽저쪽 옮겨 다니며 좋은 것만 누리겠다.” 이게 내 주장의 요지였다.

눈앞에 닥친 구체적인 사건 없이 지금까지 익숙하던 생활 터전을 바꾼다는 게 말처럼 쉽지는 않다. 실행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자신을 설득하고 확신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리고 지방에 집을 장만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어느 해 여름휴가 때, 가족들과 전남 담양 어느 마을 뒤편에 자리 잡은 독수정에 올라가 두 시간 정도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쉰 적이 있었다. 독수정, 면앙정, 서하당… 다 좋았다. 그 여름 이후로 우리 부부는 정자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누가 위시리스트를 물으면 외제 차나 세계여행이 아니라 이구동성으로 ‘정자!’ 했으니 아마 ‘사차원’ 부부라 생각했을 것 같다.

이 마루를 잘 활용해야 하는데 수시로 쓸고 닦아야 하니 일이 많다. 게다가 바깥 시선이 차단된 입식 구조의 아파트 거실에 익숙해져 있던 터라 이렇게 개방된 공간이 아직 낯설다. [사진 박헌정]

이 마루를 잘 활용해야 하는데 수시로 쓸고 닦아야 하니 일이 많다. 게다가 바깥 시선이 차단된 입식 구조의 아파트 거실에 익숙해져 있던 터라 이렇게 개방된 공간이 아직 낯설다. [사진 박헌정]

정자를 향한 꿈은 곧 ‘한옥’으로 확장되었다. 합리적인 가격대의 마당 있는 한옥을 알아보기 시작했는데 가회동이나 북촌은 평범한 직장인이 넘볼 수 없었다. 익선동은 종로3가와 바짝 붙은 게 부담되었다. 그때 결심했으면 큰돈 벌었을 것 같다.

그러다가 문득 전주에 한옥이 많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전부터 여행 다니며 접하던 전주의 이미지는 괜찮았다. 뭔가 오래된 듯 아득한 느낌이 있었고 재정이 넉넉한 도시는 아닌데도 궁색함보다 청빈한 단정함 같은 것이 느껴졌다. 두 계절 발품 판 끝에 조용한 단독주택을 한 채 마련했다. 서울의 30평대 아파트보다 훨씬 저렴했다.

당장 내려올 수 없으니 오랫동안 세를 놓았다. 나의 회사생활이 끝나고 올해 임대계약이 만료되어 내려올 수 있었다. 집을 산 지 8년 만이다. 인구 66만 명의 이 작은 도시로서는 은퇴자보다는 왕성하게 경제활동 중인 현역들이 유입되는 게 더 반갑겠지만, 이제 나는 전주 시민의 의무를 다하며 살아가려 한다.

약간의 상추와 고추 모종을 사다가 화단 한쪽에 심어보았다. 조금씩 따먹으면 재미있을 것 같은데 잘 나올지 모르겠다. [사진 박헌정]

약간의 상추와 고추 모종을 사다가 화단 한쪽에 심어보았다. 조금씩 따먹으면 재미있을 것 같은데 잘 나올지 모르겠다. [사진 박헌정]

새로 이사한 집은 방문을 열면 마당, 마당에 나서면 낮은 담장 너머로 이웃집들이다. 아침에 세수도 하지 않은 얼굴로 마당을 정리하거나 골목을 쓸다 보면 이웃을 다 만난다. 덜 풀린 목소리로 인사하면서 아파트가 정말 밀폐된 공간이었음을 느낀다.

이사 온 후로 계속해서 단잠을 잔다. 오늘도 새벽에 살짝 깼을 때 '이 침대가 원래 이렇게 편안했던가?' 생각하다 다시 잠들었고, 그다음에 깼을 때는 워낙 잘 잔 후라 더는 뭉개지 않고 일어났다. 단잠의 원인을 생각해봤다. 집이 조용해서다. 우리 동네는 큰길에서 멀리 떨어져 평소에도 조용하다. 물론 바쁜 이동이 필요할 때에는 그만큼 불편도 따른다.

얼마 전까지 살던 서울 아파트는 큰 도로변이라 두꺼운 창을 이중으로 닫아도 뭔가에 집중하지 않을 땐 차 소리가 들렸다. 아, 그러고 보니 차 소리와 새 소리의 차이구나! 차 소리는 좋은 잠을 방해하고 새 소리는 적당할 때 잠을 깨워 좋은 잠이 나쁜 잠으로 변하는 걸 막아주었다.

고층아파트에서는 좀처럼 들을 수 없던 새소리와 빗소리를 통해 ‘소리’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게다가 별채의 하얀 벽에 아침 햇살이 비칠 때마다 ‘빛’의 색깔을 놀라곤 한다. [사진 박헌정]

고층아파트에서는 좀처럼 들을 수 없던 새소리와 빗소리를 통해 ‘소리’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게다가 별채의 하얀 벽에 아침 햇살이 비칠 때마다 ‘빛’의 색깔을 놀라곤 한다. [사진 박헌정]

아침에 마당 청소를 하려고 나올 때, 별채의 하얀 벽에 분명하게 대비되어 드러난 햇살의 위력을 느끼며 비로소 ‘빛’의 색깔을 처음 제대로 보았다. 단독주택의 매력이 이런 것인 줄 몰랐다. 물론 아직 아파트에 적응된 몸 곳곳의 ‘불편신고’가 접수된다.

새로 자리 잡은 도시, 결혼 후 처음 살아보는 단독주택… 아직 매우 낯설다. 마당에서 웅크리고 잡풀을 정리하거나 구석구석 마땅찮은 것들과 씨름하다 보면 하루가 다 지나간다. 호기심 많은 강아지만 졸졸 따라다니며 신난다. 눈치 볼 것 없이 마음대로 짖고 뛰어논다.

짧은 하루가 지나 골목에 가로등이 들어오면 곧바로 정적이 깃든다. 나 역시 아홉 시 넘으면 잠자리에 든다. 지금껏 '나인 투 파이브(9 to 5)'를 일의 개념으로 생각했는데 밤의 ‘9 to 5’는 휴식임을 알았다. 생활이 많이 바뀐다. 은퇴 후 맞은 극적인 환경변화라 당분간은 새로운 보금자리 이야기를 자주 하게 될 것 같다.

박헌정 수필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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