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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일만 딱 … 인생2막, 필요한 돈은 얼마나 될까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박헌정의 원초적 놀기 본능(30)

며칠 전 학생들에게 욕심에 관한 이야기를 전했다. 하루 동안 걸으며 표시한 땅이 전부 자기 차지가 된다는 말에 무리해서 욕심부리다가 숨을 거둔 사람의 이야기였다. [사진 박헌정]

며칠 전 학생들에게 욕심에 관한 이야기를 전했다. 하루 동안 걸으며 표시한 땅이 전부 자기 차지가 된다는 말에 무리해서 욕심부리다가 숨을 거둔 사람의 이야기였다. [사진 박헌정]

며칠 전에 서울 시내 한 고등학교에서 ‘고전을 읽는 즐거움’에 대한 강연을 했다. 톨스토이가 노년 들어 농민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쉽게 쓴 교훈적인 우화들에 관해 설명하다가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Does a Man Require Much Land?)』의 내용을 잠깐 언급했다. 하루 동안 걸으며 표시한 땅이 전부 자기 차지가 된다는 말에 무리해서 욕심부리다가 숨을 거둔 사람의 이야기다. 결국 그가 얻은 것은 자기가 누울 묏자리만큼의 땅이었다.

강의 후 강연료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에게는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할까 생각해보았다. 퇴직 4년째인 올해, 생전 처음으로 수입 목표를 세웠다. 회사 다닐 때는 내가 목표를 세운다고 해서 회사가 돈을 더 줄 리 없었고, 그건 월급쟁이의 단점보다는 장점이었다.

나의 연간 수입 목표는 500만원이다. 직장에서의 소득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그래도 목표라는 것은 사람을 집중시킨다. 물론 재직할 때처럼 목표달성을 위해 무리할 생각은 없다. 그저 내 사회적인 능력을 합당한 가치로 인정받고 싶을 뿐이다.

통계청 사이트에서 월평균 가구소득을 검색해보니 460만 원 선, 그러니 나의 일 년 치 목표는 다른 가정의 한 달 소득 정도다. 그렇지만 약간의 저축과 아내의 벌이를 믿고 조기 은퇴를 감행한 50대의 연 수입 500만원은 살림에 보탬이 될 수 있는 돈이다. 직장 없이 직업만으로, 그것도 작가라는 직업으로 감히 수입 목표를 정하는 건 애초부터 무모한 일이다. 그래도 목표는 꼭 필요했다.

은퇴는 곧 ‘경제적인 제로생산' 상태이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모든 면의 제로 상태로 몰아붙인다. 그래서 은퇴자는 돈보다 역할이 필요하다. 은퇴자에게 일, 직장, 수입만큼이나 절실한 것은 떳떳한 '역할'이고 그 역할이 과연 나 혼자의 만족이 아니라 누군가에게도 쓸모 있는 것임을 입증하는 데에는 돈보다 더 확실한 것이 없다. 그래서 나는 수입을 향해 노력한다. 내게도 돈이 절실하지만 인생 2막이 시작된 후 돈은 생계유지와 더불어 존재와 역할, 그리고 활동력의 지표가 되고 있다.

나는 은퇴를 하고 연 수입 500만 원으로 살림에 보태고 있다. 500만 원이 내 연간 수입 목표다. 작가라는 직업으로 수입 목표를 정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지만, 그래도 목표는 필요하다. [중앙포토]

나는 은퇴를 하고 연 수입 500만 원으로 살림에 보태고 있다. 500만 원이 내 연간 수입 목표다. 작가라는 직업으로 수입 목표를 정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지만, 그래도 목표는 필요하다. [중앙포토]

물론 자원봉사나 재능기부도 가능한데 단지 ‘공짜’라는 이유로 변변찮게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보니 구매할 능력이 있는 곳에서는 반드시 돈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 원고료와 강연료가 수입의 대부분이다. 남한테 뭔가를 제공하고 받는 사례비도 당당한 일이라면 마다치 않을 셈이다.

이대로라면 올해는 목표를 달성할 것 같다. 앞으로 관록이 붙고 더 달려들면 늘 수도 있겠지만 그다지 목표를 더 잡을 생각도 없다. 한번 은퇴를 선언한 이상 목표를 아무리 높여봐야 예전보다 더 벌 수는 없다. 괜히 차분하게 설정했던 인생 2막 계획만 방해받을 게 뻔하다.

그러니 버는 돈에 만족해야 한다. 그런 차원에서 500만원이란 돈의 가치를 생각해봤다. 스타 연예인들이 무명 시절에 벌던 연간 수입이라고도 하고, 언젠가는 지리산에 사는 산악인이 된장을 담가 지인들에게 보내주면서 얻는 총액이 그 정도라며 해맑게 웃는 모습을 보았다. 그런 걸 보면 500만원은 뭔가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일을 딱 그만큼만 하면서 벌 수 있는 돈, 그러나 복작대며 경쟁하는 세상을 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돈이다.

얼마 전에 은퇴를 앞둔 한 선배와 식사 도중에 500만원 수입 목표를 이야기하자 그 선배는 자기의 첫해 수입 목표액과 똑같다고 했다. 그는 산속에서 사는 게 꿈이라 진작에 강원도에 큰 산을 사놓고 요즘 임산업(林産業)을 열심히 연구 중이다.

은퇴는 곧 '경제적인 제로생산' 상태다. 하지만 은퇴자에게 일, 직장, 수입보다 중요한 것은 '역할'이다. [중앙포토]

은퇴는 곧 '경제적인 제로생산' 상태다. 하지만 은퇴자에게 일, 직장, 수입보다 중요한 것은 '역할'이다. [중앙포토]

"아, 그러시냐?" 하다 생각해보니 같지만 같지 않은 돈이다. 그는 산속에서 땅 갈아서 충분히 먹고 살다 남은 것을 내다 팔아 얻는 소득이고, 나는 그 소득에서 옷값, 머리하는 값, 차비, 커피값 빠져나갈 것이니 어떻게 같을까. 도시생활과 탈도시생활의 차이가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러니 도시생활은 잘 버는 현역들에게만 유리한 것 같다. 엊그제만 해도 요즘 강의 나갈 때 입을 옷이 마땅찮아 아웃렛에 가서 20만원 주고 콤비 재킷을 샀다. 강의료가 옷 한 벌로 바뀌었다.

처음 원고료를 받았을 때, 직장에서의 하루 일당에도 못 미치고 경조사비 몇 번 내면 끝날 돈이었지만 소중한 의미가 느껴졌다. 글 써서 번 돈! 그 크기야 어찌 됐든 진작부터 희망하던 '돈 버는 작가'가 되었다. 마흔 넘으면서부터 ‘직장생활 틈틈이 뭐라도 배우면서 제2의 인생 준비하라’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별 신경 안 쓰고 문학작품 읽고 글 쓰며 지냈다. 그런데 결국 그쪽으로 더 파게 될 줄이야!

원고료든 강연료든 담당자들은 "얼마 되지 않지만, 너무 적어 죄송하지만"이란 말을 달고 산다. 우리 사회에서 언제 콘텐츠란 게 비싼 값을 받은 적 있다고 그렇게들 미안해하는지. 그렇지만 그 돈은 ‘역할 인증서’를 넘어 생활이고 삶이니, 당연히 염려해줄 만하다.

사실 그들이 미안해할 일은 아니다. 내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지. 부족하면 덜 먹든가 더 벌든가. 문인은 가난이 진입장벽이라던 어떤 작가의 말이 떠오른다. 참 섬뜩한 역설이다.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돈이 필요할까? 지금부터 그걸 생각해봐야겠다.

박헌정 수필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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