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나도 서울역에 있었다, 그래서 광주에 빚"···文의 5·18 기억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BH 리포트 

5ㆍ18 민주화운동 기념식을 앞두고 있던 지난 15일 청와대 참모들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기념사 초안을 보고했다. 초안을 읽어본 문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두 가지 추가 요청을 했다고 한다.

“기념사를 더 통렬하게 만들어달라. 그리고 더 이상의 소모적 논쟁은 여기서 끝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18일 오전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열린 제39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한 뒤 희생자 안종필의 묘를 찾아 참배하고, 어머니 이정님 씨를 위로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이 18일 오전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열린 제39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한 뒤 희생자 안종필의 묘를 찾아 참배하고, 어머니 이정님 씨를 위로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참모들이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문 대통령은 1980년 5월 광주에 대한 자신의 기억을 털어놨다.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회군

문 대통령은 참모들에게 “내가 광주 5ㆍ18의 발단이 된 서울역 회군 때 그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5ㆍ18 소식은 유치장에서 들었다”며 자신의 얘기를 꺼냈다고 한다.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광장에는 20만명에 달하는 대학생들이 집결했다. 그중에는 그해 봄 경희대 제적 5년 만에 복학한 문 대통령도 있었다. 군 투입설이 퍼지면서 학생들이 동요했다. 문 대통령을 비롯한 복학생들이 총학생회 회장단을 설득했지만, 해산이 결정됐다.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앞에 집결한 대학생들은 이날 해산을 결정했다. '서울역 회군'으로 불린다. 뉴시스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앞에 집결한 대학생들은 이날 해산을 결정했다. '서울역 회군'으로 불린다. 뉴시스

‘서울역 회군’으로 불리는 이 결정에 대해 문 대통령은 저서 『운명』에서 “대학생들의 마지막 순간 배신이 5ㆍ18 광주항쟁에서 광주시민들로 하여금 그렇게 큰 희생을 치르도록 했다고 생각한다”고 적었다.

5ㆍ18 전날인 17일 문 대통령은 결혼을 약속했던 김정숙 여사의 부모에게 인사하기 위해 강화도에 있었다. 신군부는 17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고, 문 대통령은 미래의 장인ㆍ장모와 부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수갑이 채워져 청량리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됐다.

경희대 법대 재학 시절 문재인 대통령(왼쪽)과 음대 성악과에 재학 중이던 부인 김정숙 여사.

경희대 법대 재학 시절 문재인 대통령(왼쪽)과 음대 성악과에 재학 중이던 부인 김정숙 여사.

문 대통령은 유치장에서 광주 소식을 들었다. 며칠 뒤 거기에서 사법시험 2차 합격 통지도 받았다. 그리고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침묵 속에 울려 퍼진 박수와 눈물

39년 뒤인 지난 18일. 문 대통령은 기념식장 연단에 섰다. 기념사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광주시민에게 너무나 미안하고…”라는 말과 함께 10초가 넘는 긴 침묵이 이어졌다. 문 대통령은 입술을 깨물었다.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광주 시민들은 박수를 보냈다.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문 대통령은 “너무나 부끄러웠다”며 힘겹게 기념사를 이어갔다. 목이 메어 목소리는 떨렸고, 눈동자는 계속 흔들렸다.

문재인 대통령이 18일 오전 광주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제39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사 도중 북받치는 감정을 추스르고 있다. 2019.5.18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18일 오전 광주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제39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사 도중 북받치는 감정을 추스르고 있다. 2019.5.18 [연합뉴스]

그는 “광주가 피 흘리고 죽어갈 때 광주와 함께하지 못했던 것이 그 시대를 살았던 시민의 한 사람으로 정말 미안합니다”라고 했다. 이어 “공권력이 자행한 야만적인 폭력과 학살에 대하여 대통령으로서 국민을 대표하여 다시 한번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전남도청을 사수하던 시민군의 마지막 비명소리와 함께 광주의 오월은 우리에게 깊은 부채의식을 남겼다”고 했다. 문 대통령이 정말 하고자 했던 말이었다고 한다.

◇“나도 5·18 유공자”

‘통렬한 기념사’에는 “독재자의 후예가 아니라면 5ㆍ18을 다르게 볼 수 없다”는 표현이 들어갔다. 또 문 대통령은 “학살의 책임자, 암매장과 성폭력 문제, 헬기 사격 등 밝혀내야 할 진실이 여전히 많다. 규명되지 못한 진실을 밝혀내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이던 윤장현 당시 광주시장과 함께 광주 전일빌딩을 찾아 5·18 당시 헬기사격에 의한 탄흔을 살펴보고 있다. [사진 광주광역시]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이던 윤장현 당시 광주시장과 함께 광주 전일빌딩을 찾아 5·18 당시 헬기사격에 의한 탄흔을 살펴보고 있다. [사진 광주광역시]

이러한 강한 메시지에 대해 청와대 내에서도 일부 반대가 있었다고 한다. “야당이 대통령의 발언을 오히려 정쟁의 도구로 활용할 수 있다”는 우려였다.

문 대통령은 그러나 “오히려 야당이 이미 역사적 합의가 이뤄진 5ㆍ18을 폄훼해 정치적으로 악용하고 있다. 지금이라도 확실한 매듭을 짓고 넘어가야 다시는 5ㆍ18에 대한 논쟁이 반복되지 않는다. 그래야만 진정한 국민통합도 가능하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금남로에 배치된 계엄군 병력의 모습. 연합뉴스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금남로에 배치된 계엄군 병력의 모습. 연합뉴스

문 대통령은 “20년도 더 전에 광주 5ㆍ18의 역사적 의미와 성격에 대해 국민적 합의를 이루었고 법률적 정리까지 마쳤다. 이제 더 이상의 논란은 필요하지 않다. 의미 없는 소모일 뿐”이라는 기념사 문구를 직접 적어넣었다.

그리고 헌법을 비롯해 5ㆍ18 관련 법률 등에 관여하고 있는 조국 민정수석을 기념식에 대동했다. 민정수석의 외부 일정 참석은 이례적이다. 청와대 핵심관계자는 “조 수석의 동행 자체가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된 메시지”라고 했다.

야당 시절이었던 2016년 4월 문 대통령은 광주를 방문해 “저도 광주특별법에 의해 5ㆍ18 국가 유공자 자격이 있다”며 “유공자 자격을 바라고 운동한 것이 아니라 (보상)신청은 안 했다”고 밝힌 적도 있다.

광주 시민들이 진압경찰과 대치중이다.

광주 시민들이 진압경찰과 대치중이다.

◇끝나지 않은 논란

하지만 “5ㆍ18 논란의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는 문 대통령의 의도와 달리 정치권의 공방은 다른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18일 오전 제39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이 열린 광주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와 악수하고 있다.   문 대통령 왼쪽 맨 뒤로 참석자들과 인사하고 있는 김정숙 여사가 보인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18일 오전 제39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이 열린 광주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와 악수하고 있다. 문 대통령 왼쪽 맨 뒤로 참석자들과 인사하고 있는 김정숙 여사가 보인다. 연합뉴스

기념식장에서 김정숙 여사가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와의 악수를 건너뛰면서 불거진 ‘황교안 패싱’ 논란이 이슈의 중심에 서버렸다. 황 대표는 21일에는 “진짜 독재자는 김정은 아닌가. 문재인 대통령은 김정은을 진짜 독재자의 후예라고 말해 달라”며 독재자 발언을 북한 문제로 연결하기도 했다.

청와대 핵심관계자는 “문 대통령이 이번 기념식에서 평소보다 강한 메시지를 주문했던 것은 불필요한 정쟁을 끝내고 미래로 가자는 뜻이자 광주를 왜곡해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에서였다”며 “그러나 오히려 또 다른 정쟁거리를 만들어낸 정치의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강태화 기자 thkang@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