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사설

노무현 서거 10주기…다시 생각해 보는 ‘통합’과 ‘실용’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오는 23일 봉하마을을 예방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0주기 추도식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부시 전 대통령은 직접 그린 노 전 대통령의 초상화를 가져와 권양숙 여사에게 선물하고 추도사도 할 예정이다. 두 정상은 재임 중 여러 차례의 회담을 통해 굵직한 외교 현안을 마무리해 냈다. 한·미 FTA(자유무역협정)나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 등이 대표적이다. 그런 부시 전 대통령이 노 전 대통령의 10주기를 맞아 추도식에 참석하는 것은 여러모로 의미 있는 일이다.

지지층 반발 정면돌파한 한미 FTA #오늘 더욱 절실한 ‘노무현표 실용’ #부시 전 대통령도 찾을 봉하마을이 #고인 유지인 ‘용서·화해’의 장 되길

마침 10주기 추도식의 주제도 ‘새로운 노무현’이라고 한다. 단순한 추모의 감정을 넘어 다시 되새겨야 할 ‘노무현의 가치’를 돌아보겠다는 취지다. 그런 측면에서 정치권이 가장 먼저 기억해야 할 그의 정신은 ‘통합’이다. 아직 대중의 뇌리에 깊이 각인된 ‘정치인 노무현’의 모습 중 하나가 정치 1번지 종로를 버리고 부산으로 내려가 지역주의의 벽에 도전하던 모습일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이 그 무렵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부르짖었던 말이 바로 ‘동서(영호남) 화합’, 즉 국민통합이었다. 따지고 보면 대통령 재임 중 제안했던 ‘대연정(大聯政)’ 구상도 극심한 진영 갈등을 넘어서려고 한나라당에 권력을 나눠주고 협치를 하자는 뜻이었으니 종로를 버리고 부산으로 가는 정치 행위와 본질은 같다. 증오와 저주의 막말이 국민을 갈라놓고 있는 2019년 5월의 대한민국에 통합이야말로 가장 절실한 가치가 아닐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이번 추도식만큼은 지난 5·18기념식에서의 분열상을 재연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5·18기념식이 떠오르는 이유는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가 광주에 이어 다시 봉하마을을 찾을 예정이기 때문이다. 노 전 대통령은 10년 전,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라면서 “누구도 원망하지 말라”고 했다. 유서를 통해 용서와 화해를 당부한 것이나 다름없다. 통합의 전제가 무엇인가. 바로 용서와 화해다. 용서와 화해 없는 통합은 없다. 부디 부시 전 대통령 앞에서 추모객들이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길 기대한다. 물론 황 대표나 한국당도 봉하마을행이 정치적 목적이라는 인상을 주지 않도록 발언을 절제하고 추모의 진정성을 지녀야 할 것이다.

노 전 대통령 서거 10주기를 맞아 두 번째로 조명해야 할 가치는 실용이라고 본다. 노 전 대통령은 진보정치인으로서의 정체성은 분명히 했지만 국정 분야에서만큼은 달랐다. 특히 경제와 외교 문제에선 이념보다 국익을 우선했다. 부시 전 대통령과 공동으로 추진한 한·미 FTA, 이라크 파병 결정 등은 지지층이라고 할 노조와 진보시민단체가 강력히 반대했으나 국익을 보고 정면돌파한 대표적 사례다. 제주해군기지도 지지층의 반대 속에 과감히 결단했다.

그의 실용주의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가 대일 외교다. 대일 외교 하면 대부분 독도 문제에 단호한 입장을 취했던 그의 연설을 떠올리곤 하지만 실제론 철저히 실리외교였다. 그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일본 총리와 ‘셔틀외교’를 성사시켜, 한 번은 자신이 일본 최남단 가고시마현의 이부스키시까지 날아가 북핵 문제를 논의했다. 또 한 번은 고이즈미 전 총리가 제주를 찾아와 현안을 논의했다. 수면 위에서나, 수면 아래에서나 꽉 막혀 있는 지금의 상황과는 달랐다.

물론 지지층의 반발을 뚫고 나가면서 치른 정치적 비용은 컸다. 내내 보수·진보 양쪽에서 협공을 받다 보니 언젠가는 자신을 가리켜 ‘좌파 신자유주의자’라고 표현한 적도 있다. 자조(自嘲) 섞인 말이었다. 하지만 ‘좌파 신자유주의자’라는 말이 이제는 자조가 돼선 안 된다. 지지층-이념의 벽을 정면돌파하지 못하고 있는 문재인 정부가 서거 10주기에 가장 새겨두어야 할 말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