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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의 역사정치] 임진왜란 후 재빨리 일어선 조선…그뒤엔 과감한 감세 있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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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복이 그린 '야금모행(夜禁冒行)'

신윤복이 그린 '야금모행(夜禁冒行)'

“도성(都城) 안은 위로 경대부(卿大夫)로부터 아래로는 시정의 천인까지 모두가 지극히 사치하여, 벽에 바르는 것은 외국의 능화지(菱花紙)가 아니면 쓰지 않고, 입는 옷은 능단(綾段)ㆍ금수(錦繡)가 아니면 쓰지 않고, 타는 말은 모두가 상승(上乘)이고, 먹는 음식은 모두가 맛나고 기름진 것이니… 그 밖에 혼인과 음식의 화려하고 사치한 것을 금단하는 일을 전하께서 먼저 궁중부터 다스리시면 뭇 신하가 어찌 감히 분수를 넘어서 함부로 행하겠습니까.” (『효종실록』 효종 3년 11월 13일)

[유성운의 역사정치] 민간에 맡긴 혁신 프로젝트

이조판서를 지냈던 조경이 올린 상소문의 일부입니다. 능화지는 궁궐 침전 등에서는 색과 무늬가 있는 고급 종이고, 능단과 금수는 모두 화려한 고급 비단을 일컫습니다.

그런데 의외라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효종 3년은 1653년, 그러니까 임진왜란이 끝나고 반세기 가량 지난 때입니다. 물론 50년이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닙니다. 하지만 7년간의 전쟁으로 온 국토가 황폐해졌던 조선은 그 후유증으로 오랫동안 신음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경대부로부터 시정의 천인까지 지극히 사치한다니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습니다.

 상소문을 올렸을 당시 조경은 일흔을 바라보는 원로였습니다. 혹시 젊은 세대를 바라보는 ‘꼰대’의 못마땅함으로 상황을 과장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런데 과장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조차 남보다 의복이 뒤처질까 우려하고, 음식이 남만 못한 것을 부끄러워한다”(『승정원일기』, 현종 5년 11월 4일)는 기록처럼 이 시기의 사치풍조를 염려한 건 조경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조선은 어떻게 외부의 조력도 없이 반세기 만에 이처럼 전후복구를 할 수 있었을까요.

임진왜란 후 재건 프로젝트-‘여민휴식’

임진왜란을 다룬 영화 '명량'의 한 장면

임진왜란을 다룬 영화 '명량'의 한 장면

전쟁이 끝나고 2년이 지난 1600년 9월 국정의 최고기구였던 비변사는 전후 복구 계획을 제출했습니다. 12개 조로 구성된 이 계획은 이후 ‘여민휴식(與民休息)’이라고 불린 국정 어젠다로 향후 60여년간 지켜졌습니다. “백성들과 더불어 휴식하면서 안정 속에 힘을 길러야 한다”는 뜻을 지닌 ‘여민휴식’ 네 글자엔 임진왜란 전 국정 운영에 대한 쓰라린 반성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7년간의 전쟁 중 조선의 지배층이 목도한 것은 전국 곳곳에서 나타난 심각한 수준의 민심의 이반이었습니다. 반란(이몽학의 난)은 그렇다 치더라도 백성들이 일본군을 ‘해방군’으로 환영하면서 일본군의 길잡이인 ‘순왜(順倭)’가 되는가 하면, 조선 관군을 공격하는 일은 충격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심지어 순왜 무리가 선조의 맏아들인 임해군을 사로잡아 일본군에 넘기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여민휴식’의 큰 틀은 토지 복구, 국가 재정 감축, 세금 감면이라는 큰 틀 아래 추진됐습니다. 민간의 부담을 최소화시키는 한편 중앙정부 차원의 개입보다는 민간경제를 활성화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이죠.

개간하면 세금 혜택을 드립니다.

조선 후기 양기훈의 '밭갈이'

조선 후기 양기훈의 '밭갈이'

농업이 주 산업이었던 조선에선 생산성이 높은 하삼도(충청ㆍ전라ㆍ경상도)의 농업 상태가 사실상 국가 경제를 좌우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반도체ㆍIT 산업군 정도랄까요.

임진왜란 전 조선의 총 농경지 면적은 151만5500 결(結)이었는데 ‘하삼도’는 66.2%(100만9720 결)을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컸죠. 그런데 임진왜란 직후 보고된 하삼도의 토지는 29만 결에 불과했습니다. 전쟁 전 1/3 수준도 안 될 정도로 급감한 것이죠.
토지 복구가 가장 긴급 과제로 떠오른 정부는 진황전(陳荒田)이라고 불린 황무지 개발을 적극적으로 독려했습니다. 하지만 악화된 민심을 감안할 때 개간을 지시한다고만 해서 성과가 담보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정부는 당근책을 제시했습니다. 토지를 개간하면 관청의 둔전(屯田)이나 개인 소유의 전답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한 것이죠. 이는 각 지방의 생산 잠재력을 크게 자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오대산사고본 효종실록 [연합뉴스]

조선왕조실록 오대산사고본 효종실록 [연합뉴스]

지방관의 입장에선 진황전을 개간해 관청의 수입으로 사용할 수 있으니 가용 예산이 늘어나는데다 개간 성과가 좋으면 근무평점에서도 고가를 받을 수 있으니 1석 2조나 다름없었습니다.
민간 입장에서도 구미가 당길만 했습니다. 국가의 용인 아래 재산을 불릴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였기 때문이죠. 조선의 산업은 사실상 농업이 전부라는 점을 참작하면, 황무지 개발은 당시로선 벤처창업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특히 ‘사족’이라고 불린 지방의 유력 세력들은 노비도 다수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개간산업에 적극적으로 달려들었습니다. 지방 관청도 성과를 내기 위해 종자와 농우를 지급하며 초기 자본을 대주는 등 독려했습니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정부는 당근책을 더 내밀었습니다. 개간된 토지를 최저 등급인 6등급으로 분류할 수 있도록 조치한 것이죠. 토지의 비옥도와 수확량에 따라 매겨지는 등급이 낮으면 그만큼 세금도 줄어듭니다.
이런 이유로 전국 각지에서 개간 열풍이 불어닥쳤습니다. 전쟁 후 복구사업은 대규모 국가예산을 투입해 경기를 활성화시키곤 하지만 이번엔 지역의 가용 자본을 자발적으로 끌어당긴 것이죠.

17세기 후반에 편찬된 경북 성주 지역의 지방지 『경산지(京山志)』에 따르면 이곳의 농경지들은 대부분 1600년대 중반에 개간사업이 완료된 것으로 나옵니다. ‘여민휴식’이 한창 진행 중이던 때입니다. 개간 열기가 과열돼 지역에서 보존해온 산림이나 저수지까지 농토로 바꿔버리는 세태를 우려하는 목소리까지 등장할 정도였습니다.

[유성운의 역사정치]

중앙정부의 허리띠 졸라매기 

2015년 '제21회 동래읍성역사축제' 왜군에 맞서 싸우는 장면을 재연한 모습 [중앙포토]

2015년 '제21회 동래읍성역사축제' 왜군에 맞서 싸우는 장면을 재연한 모습 [중앙포토]

 개간 사업을 장려한 중앙 정부가 착수한 것은 세금 경감 정책이었습니다.
한 연구에 따르면 이 시기에 냈던 세금은 토지 1결당 생산량의 12.1%~15.4% 정도라고 합니다. 통상 20%가량을 납부한 것과 비교하면 확실히 줄어든 셈이지요. 10% 이하였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세금을 줄인다는 것은 정부의 씀씀이를 줄이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없습니다. 이 때는 국채를 발행한다든가 적자 재정이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죠.
실제로 조선 정부는 재정 규모를 최소화하는 재정 개혁안도 내놓았습니다. 다만 국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워낙 크기 때문에 주먹구구식으로 깎아내릴 수는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긴축예산안을 만드는 데는 몇 년의 시간이 소요됐습니다.

조선시대 선조 임금 밑에서 영의정을 지낸 서애 류성룡이 임진왜란 발발 첫 날부터 끝난 날까지 기록한 '징비록' 초본. ‘징비록(懲毖錄)은 ‘지난날의 잘못을 경계해 뒤에 환난이 없도록 삼가다’는 뜻이다. [중앙포토]

조선시대 선조 임금 밑에서 영의정을 지낸 서애 류성룡이 임진왜란 발발 첫 날부터 끝난 날까지 기록한 '징비록' 초본. ‘징비록(懲毖錄)은 ‘지난날의 잘못을 경계해 뒤에 환난이 없도록 삼가다’는 뜻이다. [중앙포토]

그렇게 해서 1605년에 나온 긴축예산안이 ‘을사공안(乙巳貢案)’입니다. 공안(貢案)은 세입을 바탕으로 왕실과 중앙의 각 관청이 필요로 하는 자금과 물품을 공급해주는 예산 지침서입니다.

을사공안에 따르면, 연간 국가재정의 총규모는 쌀 10만 석 미만으로 정해졌습니다. 이는 임진왜란 전 예산인 20만 석의 절반에 불과한 수치였습니다. 조정은 관료들의 인건비 같은 경상비 외엔 대부분 삭감하는 그야말로 뼈를 깎는 노력자구책을 내놓았습니다. 정부가 재정규모 축소를 위해 얼마나 고심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 외에 국가 주도의 대규모 사업이나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기진 예산 외에는 모두 폐지 혹은 축소했습니다.

조선의 빠른 회복과 혁신의 노력  

임진왜란 전과 '을해양안(1635년) 당시의 토지 면적 비교. 김성우 『전쟁과 번영- 17세기 조선을 바라보는 또 다른 관점』에서 인용

임진왜란 전과 '을해양안(1635년) 당시의 토지 면적 비교. 김성우 『전쟁과 번영- 17세기 조선을 바라보는 또 다른 관점』에서 인용

 이런 노력은 성과로 나타났습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유형원의 『반계수록(磻溪隧錄)』에 따르면 1632년에 시행한 토지조사 사업에서 하삼도 지역의 토지면적은 89만4871 결로 나타납니다. 30년 만에 임진왜란 전 89% 수준까지 복구한 셈입니다.

심지어 37만9438 결(42.4%)에 달하는 ‘진황잡탈전(陳荒雜?田)’에선 세금을 거두지 않았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정작 이 시기 국가 연간재정은 20만 석을 회복한 상태였습니다. 당시의 재건 프로젝트가 얼마나 확실한 결과를 거둬들였는지를 보여주는 척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 해도 42.4%나 되는 토지에 세금을 거두지 않고도 재정 확보가 가능했을까요.

서울 미동초등학교생들이 8일 서울 서대문구 농협중앙회 농업박물관 뜰에서 손모내기 체험을 하고 있다. [김상선 기자]

서울 미동초등학교생들이 8일 서울 서대문구 농협중앙회 농업박물관 뜰에서 손모내기 체험을 하고 있다. [김상선 기자]

전쟁이 끝난 데다 농토가 확장되고 세금은 줄다 보니 인구가 늘어났습니다. 토지는 한정됐기 때문에 개간을 무한정 할 수는 없었죠. 결국 생산력을 증대하려면 농업 기술을 확보하는 것이 관건이 됐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 도입된 것이 이앙법(모내기)입니다. 수전 농업의 대표적 기술인 이앙법은 단위면적당 생산력을 2배 가량 늘릴 수 있지만 풍부한 물이 필요하기 때문에 가뭄에는 취약하다는 약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부에선 이앙법을 막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인구 증가와 느슨해진 중앙 정부의 통제력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17세기 초반만 해도 경상도 일부 지역에서만 쓴 이앙법이 18세기 초엔 평안도까지 퍼졌을 정도로 전국 각지로 퍼져 나갑니다. 농민들은 보나 저수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가뭄에 대처하는 방법을 발전시키면서 과감하게 이앙법을 확대해 나갔습다.

조선 정부 역시 기존의 농업 위주 경제를 벗어나 상업과 유통경제에 눈을 돌렸고 염전이나 은광 개발, 동전 주조 등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임진왜란의 충격에서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조선은 어떻게 살아남았나

사적 제118호 진주성 [연합뉴스]

사적 제118호 진주성 [연합뉴스]

조선이 임진왜란을 거치면서도 망하지 않았다는 것은 역사의 오랜 물음표였습니다. 심지어 일본과 명나라는 임진왜란을 거치며 모두 정권이 무너지는 흐름에서 정작 무능함을 드러낸 지배층이 어떻게 계속해서 200년을 더 이어나갈 수 있었냐는 것이죠.
과거엔 조선 양반층이 성리학적 질서를 강화해 사회 불만을 억눌렀다고 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최근 연구들은 그러한 강압보다는 지도층의 각성에 더 주목하고 있습니다.

임진왜란의 상처는 컸습니다. 조선의 인구는 1/3 가량 감소했고, 토지의 70~80% 가까이 황폐해졌습니다. 말 그대로 그로기 상태에 놓인 꼴이었습니다.
이런 현실 앞에서 조선의 국정 운영자들은 과감하면서도 유연한 개혁을 시작했습니다. 세금을 줄이고, 민간의 참여를 늘리고, 국가 예산을 긴축하면서 사회 구성원의 이해를 구했습니다. 또 100년의 시간을 들여 대동법이라는 세제 개혁을 완성시키기도 했습니다. 경기도 등 일부 지역에서 시범적용을 해본 뒤 그 성과를 갖고 전국에 확대하는 방식을 쓴 것이죠.

정부의 이런 노력에 민간은 기꺼이 응답했고, 조선은 불과 50년 만에 전쟁 전 수준을 회복하는 저력을 보였습니다. 조선사에서 민관이 함께 전진했던 몇 안 되는 장면입니다.

경기도 평택시 소사동에 있는 `대동법 시행기념비`. 1659년(효종 10)에 김육이 충청 감사로 있을 때 삼남 지방에 대동법을 실시하면서 백성들에게 균역하게 한 공로를 잊지 않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삼남 지방을 통하는 길목에 설치했다. [중앙포토]

경기도 평택시 소사동에 있는 `대동법 시행기념비`. 1659년(효종 10)에 김육이 충청 감사로 있을 때 삼남 지방에 대동법을 실시하면서 백성들에게 균역하게 한 공로를 잊지 않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삼남 지방을 통하는 길목에 설치했다. [중앙포토]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뒤 재정 규모는 갈수록 불어나는데 민간의 체감 경기는 살아나지 않는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습니다. 물론 인구 변동이나 제조업의 쇠퇴 흐름 등을 감안하면 분명 어려운 시기이고, 정부가 주장하는 '체질 개선'이나 시간이 필요하다는 설명도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서울 강남의 유명 상권조차 줄줄이 빈 점포가 늘어나거나 중견 기업들이 줄줄이 공장을 해외로 이전하는 상황을 보면 "경제의 큰 그림을 보라"는 정부의 설명이 언제까지 힘을 받을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경제는 심리라고 하죠. 조선이 임진왜란 후 경제를 회복할 수 있었던 데는 체감할 수 있는 결과가 주어졌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예를 들어 세금 혜택을 받는 개간지가 재산으로 불어나는 것처럼 말이죠.
집권 3년차로 접어들었습니다. 문재인 정부의 경제 성적표가 숫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민간에 체감되는 성과로 이어지기를 기대합니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이 기사는 김성우 『전쟁과 번영- 17세기 조선을 바라보는 또 다른 관점』, 신병주『1623년 인조반정의 경과와 그 현재적 의미』, 조광 『17세기 동아시아사의 전개와 특성-한국사의 흐름을 17세기 세계사 속에서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를 참고해 작성했습니다. 기사에서 쓰인 수치 및 통계는 김성우 『전쟁과 번영- 17세기 조선을 바라보는 또 다른 관점』에서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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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의 역사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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