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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의 역사정치] "문종 병 고칠 의사 보내라" 고려, 日에 요청 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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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의 역사정치 

1079년 겨울, 일본 교토(京都)의 조정은 서신 한 통을 놓고 큰 고민에 빠집니다.
대외교섭 창구인 규슈의 다자이후(太宰府)에서 올린 이 서신의 발신자는 고려 조정이었습니다. 한 상인을 통해 예물과 함께 전달된 이 편지에는 고려 국왕 문종의 병(중풍)을 치료할 수 있도록 유능한 의사를 보내달라는 요청과 함께 효험이 있다면 크게 보답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이듬해 여름까지 난상 토론을 벌였습니다. 일본 최고의 명의로 명성을 떨치던 탄바노 마사타다를 파견하자는 의견이 형성되기도 했지만, 결국 정중하게 거절하는 것으로 매듭을 지었습니다.
한-일 양국사에서 전례를 찾을 수 없는 이 흥미로운 사건은 성과를 얻지 못한 부담 때문인지 한국 사서엔 한 줄도 기록되지 않았고 그대로 묻혀버렸습니다.

그렇다면 고려의 요청이 왜 일본을 들끓게 만들었던 것일까요. 또, 일본은 왜 거절하게 됐을까요.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쌍화점'의 한 장면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쌍화점'의 한 장면

일본과의 국교를…고려의 노력

삼국시대엔 일본이 한반도 국가들과 관계 맺기를 원했습니다. 한반도가 흡수한 중국의 선진 문명을 전수받고 싶어서였죠.
이런 분위기는 통일신라를 지나 고려가 들어설 무렵엔 180도 달라집니다. 고려는 일본에 수차례 사신을 보내며 국교를 맺자고 요청했던 반면 일본 측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한 것이죠.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가 처음으로 일본에 국교 요청을 한 것은 후삼국을 통일한 이듬해인 937년입니다. 국가의 틀이 정비되자마자 추진한 셈입니다. 하지만 일본 측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2년이나 지난 뒤에야 조정의 실권자인 섭정태정대신 후지와라노 타다히라는 거절의 답장을 보냈습니다. 이후에도 939년과 940년, 997년에도 고려는 국교 관계를 논의하고자 했지만, 번번이 막혔습니다. 심지어 997년엔 “일본을 모욕하는 구절이 있다”며 답신조차 보내지 않았습니다.

후지와라노 타다히라

후지와라노 타다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는 많은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여진족 해적들이 일본 북큐슈 지역을 약탈하자 이를 소탕하는 한편 일본인 포로 259명을 무사 귀환하도록 조치한 일이 대표적입니다.
당시 일본의 고위 관료 후지와라노 사네스케가 남긴 『오우키(小右記)』라는 기록에 따르면 당시 고려의 관리는 일본인들에게 옷과 음식을 대접하며 “이런 우대는 단지 너희들을 위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본을 존중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고려는 왜 이토록 일본과의 국교에 관심을 가졌을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고려는 건국 초기부터 거란·여진 세력과 극심한 갈등을 겪었습니다. 따라서 군사력을 북방에 집중해야 했고, 후방을 안정시켜야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일본은 중요한 존재였던 것이죠.

고려의 대외관계 [자료=천재학습백과]

고려의 대외관계 [자료=천재학습백과]

또 고려의 창업자인 왕건 가문이 본래 예성강 일대서 무역으로 기반을 쌓은 집안입니다. 고려 지도층은 경제적 교류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졌는데, 일본과의 국교 노력엔 경제적 판단도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고려 문종이 치부일 수도 있는 병명까지 밝히며 의료진을 요청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 해석해볼 수 있습니다. 정공법으로 풀리지 않는 일본과의 국교를 위해 실마리를 만들고자 한 것이죠.

일본은 왜 고려를 거절했나

일본 측은 왜 고려와 거리를 두려 했을까요. 고려를 ‘국호만 바꿨을 뿐 신라를 계승한 나라’라고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신라와 구원(舊怨)이 있었습니다.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해 백제를 멸망시키자 백제계 유민들은 대거 일본으로 건너가 일부는 지도층으로 편입됐습니다. 신라에 대한 여론 바탕이 우호적일 수 없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이런저런 이유로 외교 마찰이 벌어지면서 842년엔 신라에서 온 귀화자를 일절 받지 않는 법을 제정할 정도로 신라를 적대시했습니다.

또 한 가지, 신라 해적의 존재입니다. 우리는 흔히 왜구(倭寇)만 떠올리지만 9세기 후반엔 신라 해적선이 일본 연안에서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이 무렵 일본은 수백 년간 평화를 누렸습니다. 외침을 받지 않으면서 자국을 청정지역이자 신국(神國)으로 신성시하는 관념이 조성되기 시작합니다. 외국과의 교류에 대해서도 배타적인 자세를 가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9세기 후반 신라 해적선의 일본 해안 침탈이 연이어 벌어지면서 일본에선 신라에 대한 강력한 배외 의식을 갖게 됐습니다.

신라 시대 해적세력을 소탕하고 해상세력을 이끌었던 장보고의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 '해신'의 세트장 [중앙포토]

신라 시대 해적세력을 소탕하고 해상세력을 이끌었던 장보고의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 '해신'의 세트장 [중앙포토]

심지어 고려가 여진족 해적을 토벌하고 구출한 일본인들을 송환해 줄 때도 일본 조정은 “신라는 원래 적국이다. 국호를 (고려로) 바꾸었지만, 여전히 야심이 남아있을까 꺼려진다(『오우키(小右記)』)”며 적당한 답례품을 주어 빨리 돌려보낼 방안을 검토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고려의 노력은 무위로 그치진 않았습니다. 비록 정식 국교 체결은 없었지만, 경상남도 김해에 무역관이 설치되면서 고려와 일본 다자이후 사이에 경제적 교류가 진행됩니다. 인삼·서적(고려)과 미술품·수은(일본) 등을 주고받으며 김해 일대엔 대마도 사람들의 집단 거주지도 형성됐습니다.

일본 다자이후 텐만구(太宰府 天満宮) [중앙포토]

일본 다자이후 텐만구(太宰府 天満宮) [중앙포토]

1227년 왜구가 경남 해안을 약탈했을 때, 고려 조정이 일본에 보낸 서신을 보면 비록 항의 형식이지만 그동안 개선된 양측 분위기를 엿볼 수 있습니다.
"최근 대마도 사람들과의 무역 편의를 생각해 특별히 무역 관사를 운영해왔고 그에 따라 화호(和好)를 유지해왔다. 해안 고을의 주민들은 종래의 호의적 교류(交好)를 믿고 의심하며 꺼리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보고에 의하면 야음에 약탈이 있었다고 한다. 이게 어찌된 연유인가" (『아즈마가가미(吾妻鏡·오처경) 中』

이에 일본 다자이후에선 사과의 답서를 보내는 한편 관련자 90명을 처형하는 성의를 보였습니다.

몽골의 일본 정벌 계획

 넷플릭스 드라마 ‘마르코 폴로’에서 쿠빌라이 칸(베네딕트 웡) [사진제공=넷플릭스]

넷플릭스 드라마 ‘마르코 폴로’에서 쿠빌라이 칸(베네딕트 웡) [사진제공=넷플릭스]

개선되던 양국 관계에 찬물을 끼얹은 것은 1267년 쿠빌라이칸이 일본에 입조를 요구하면서입니다.
원나라 역사서 『원사(元史)』에 따르면 “고려 사람 조이(趙彞) 등이 일본국(日本國)과 통할 수 있다고 했기 때문에 사신의 임무를 봉행할 만한 자를 선택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쿠빌라이 칸이 조이의 조언에 솔깃한 것은 양자강 이남에서 항전하고 있던 남송(南宋) 때문이었습니다. 조이는 일본을 굴복시키면 남송(南宋)을 고립시켜 정복이 쉬워질 것이라고 설명했고, 쿠빌라이 칸은 이 책략이 맘에 들었던 모양입니다.

원나라의 황후가 된 고려 여인의 일대기를 다룬 MBC 드라마 '기황후'

원나라의 황후가 된 고려 여인의 일대기를 다룬 MBC 드라마 '기황후'

조이는 경남 함안 출신으로 몽골어에 능통해 쿠빌라이칸의 측근이 된 관료였습니다. 본인의 출세에는 도움이 됐겠지만 고려에는 악재가 됐습니다.
쿠빌라이칸은 고려 국왕 원종에게 이렇게 조서를 보냈습니다.

“그대(원종)는 사신이 그 땅(일본)에 도달하도록 안내하여 동쪽 사람들을 깨우치고 중국의 의를 사모하도록 하라. 이 일은 경(卿)이 책임지고, 풍랑이 험하다는 말로 핑계 대지 말고 이전에 일본과 통한 적이 없다고 하며 혹시 그들이 명령에 따르지 않고 보낸 사신을 거부할까 염려된다고 핑계 대지 말라. 경의 충성심은 이 일로 드러날 것이니 각별히 힘쓰라.” (『고려사』 원종 7년 11월 25일)

[유성운의 역사정치]

‘일본 침공을 막아라’, 고려의 필사적 노력 

일본 불교의 한 종파인 일련종의 창시자 니치렌 성인. 여몽 연합군의 침략을 예언해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일본 불교의 한 종파인 일련종의 창시자 니치렌 성인. 여몽 연합군의 침략을 예언해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이때 고려 조정의 실력자는 이장용이라는 재상이었습니다. 고려의 대표적 문벌귀족인 경원이씨 집안으로 19세에 문과에 급제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은 엘리트였습니다. 몽골이 고려의 입조와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를 요구했을 때는 이에 반대하는 무신정권에 맞서 몽골의 요구를 관철하기도 했습니다.
얼핏 보면 일찌감치 친몽골 노선을 택해 앞길이 보장된 고위 관료였습니다. 하지만 몽골의 일본 입조 요구에 대해 이장용은 예상 밖 행보를 걷습니다.

그는 일본에 가기 위해 고려에 와있던 몽골 사신 흑적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오랫동안 고립됐던 일본이 절대 입조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한편 "바다가 험난하기 때문에 일본으로 가다가 변고를 당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장용의 계획은 성공을 거둬 사신들을 몽골로 돌려보내는 데 성공합니다.

또한 몽골에도 서신을 보내 “예로부터 고려ㆍ일본 양국은 통호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대마도인이 간혹 무역 때문에 금주(金州ㆍ김해)에 왔을 뿐입니다”라며 일본과의 관계를 부인했습니다. 그러면서 “중국과 일본은 바다로 만리를 사이에 두고 있고 매년 공물을 보낸 적도 없습니다. 그동안 중국도 찾아오면 받고, 오지 않으면 관계를 끊었는데 일본과의 교류가 황제의 권위를 손상할 일도 없습니다”라고 달래기도 했습니다. 일본은 굳이 상대할 가치가 없다고 강조한 것입니다.

몽골-고려 연합군에 맞서 싸운 일본 측 활약상을 담은 '몽고습래회사(蒙古襲來繪詞)'의 한 장면

몽골-고려 연합군에 맞서 싸운 일본 측 활약상을 담은 '몽고습래회사(蒙古襲來繪詞)'의 한 장면

일본에도 손을 썼습니다. 쿠빌라이칸의 조서와 고려의 국서를 함께 보내 위급함을 알리는 한편 김해에 있는 무역관을 황급히 철거해 일본과의 교류 증거를 모두 인멸했습니다.
이런 시도는 아슬아슬한 줄타기에 가까웠는데, 일본 침공을 무산시키기 위한 그의 필사적인 노력은 몽골의 발걸음을 일단 붙잡아 두는 데는 성공했습니다.

이장용은 왜 일본을 구하려 했나

몽골의 일본 침공에 대비해 쌓은 일본 규슈 지역 방어진의 흔적 [중앙포토]

몽골의 일본 침공에 대비해 쌓은 일본 규슈 지역 방어진의 흔적 [중앙포토]

이처럼 이장용이 애를 쓴 것은 그것이 초래할 여러 가지 문제를 간파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30년에 걸친 몽골과의 전쟁 경험, 일본과의 교류를 통해 ‘몽골의 입조 요구→일본의 거부→몽골의 침공’이라는 전개가 간신히 안정을 찾아가던 고려를 파탄으로 끌고 가리라 우려했습니다.

또 어두운 과거를 씻고 오랜 노력을 통해 개선되던 양국 관계를 다시 악화시키는 것도 원치 않았습니다.
양국은 공식 국교를 맺진 않았지만, 경제교류를 통해 이익을 누리고 있었고, 연안 지역도 안정화되어 가던 참이었습니다.

이런 노력은 몽골을 속이려는 ‘약소국의 잔꾀’가 아니라 ‘일본은 몽골에 입조하지 않는다’는 냉정한 판단에 이어진 현실적 선택이었습니다. 하지만 속내를 간파한 몽골은 이장용을 해임하라고 요구했고, 관직에서 물러난 그는 울화 등이 겹친 탓인지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돼 1년 뒤 사망합니다.

몽골-고려 연합군 침공 당시 일본을 이끈 호조 도키무네는 최근 인기 역사시뮬레이션 게임 '문명 6'에서 일본의 지도자로 소개되기도 했다. [중앙포토]

몽골-고려 연합군 침공 당시 일본을 이끈 호조 도키무네는 최근 인기 역사시뮬레이션 게임 '문명 6'에서 일본의 지도자로 소개되기도 했다. [중앙포토]

상황은 그의 우려대로 흘러갔습니다. 당시 일본을 이끌던 가마쿠라 막부의 실권자 호조 도키무네(北條時宗)는 몽골의 요구를 일축했습니다.
“귀국(몽골)은 일찍이 우리와 인물의 왕래는 없었다. 또한 우리는 귀국에 대해 아무런 감정이 없는데 흉기를 쓰려고 하고 있다. 성인이나 불교의 가르침은 구제를 일삼고 살생을 악업으로 하는데 왜 귀국은 오히려 민중을 살상하는 근원을 열자는 것인가. 일본은 아마테라스 왕세신(아마테라스 오가미)의 천통을 빛내고, 오늘날에 이르렀다. 일본의 국토는 옛날부터 신국으로 칭한다. 잘 생각해보라.” (『태정관반첩(太政官 返牒)』

겉으론 엄숙하게 꾸짖긴 했지만, 일본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일본 조정은 신궁에 국난을 고하는 한편, 각 신사와 사찰에서는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도록 했습니다. 또 침공에 대비해 규슈의 하카타만(博多灣)에 성을 쌓는 등 총력 방위체제로 돌입했습니다.

'무쿠리'와 '고쿠리'의 전설 

 몽골-고려 연합군에 맞서 싸운 일본 측 활약상을 담은 '몽고습래회사(蒙古襲來繪詞)'의 한 장면. 그림 중 활을 쏘는 측은 고려군으로 추정되고 있다.

몽골-고려 연합군에 맞서 싸운 일본 측 활약상을 담은 '몽고습래회사(蒙古襲來繪詞)'의 한 장면. 그림 중 활을 쏘는 측은 고려군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장용이 죽고 2년이 지난 1274년 몽골과 고려·여진 등 연합군 3만명은 일본을 침공했습니다. 쓰시마와 이키(壹岐)를 점령하고, 규슈 하카타에 상륙했습니다. 세계 최강이던 몽골군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은 일본군을 궤멸하고 연안 지대를 약탈했습니다. 규슈 지역엔 훗날까지 '무쿠리(몽골)', '고쿠리(고려)'라는 용어가 공포의 대명사로 자리 잡을 정도로 당시 원정군의 흉포함을 전하는 전승들이 전해졌습니다.

“남자는 죽이거나 포로로 삼고 여자는 한곳에 모아 손바닥에 줄을 꿰어 뱃전에 매달았다. 잡힌 자 중 목숨을 건진 사람은 없었다(『니치렌성인주서찬(日蓮聖人註畵讚)』”

“고려 병사들은 닥치는 대로 죽였다. 사람들은 참지 못하고 처자를 데리고 싶은 산에 숨었지만 (적군이) 갓난아기의 울음소리를 듣고 몰려오니, 짧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사랑하는 아기를 울며불며 살해하였다”(『하치만구도쿤(八幡愚童訓)』)

이후 '가미카제'라고 명명된 태풍 등의 영향으로 침공을 막아낸 일본에서는 신국사상이 고취되면서 독선적인 자국 우월의식이 극대화됐습니다. 또한 고려에 대한 노골적인 멸시관이 풍미하면서 고려 정벌 계획이 논의되기도 했습니다. 고려와 일본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고, 이는 조선까지 이어집니다. 수십 년이 지나 일본의 왜구 약탈이 극심해졌지만, 양국은 예전처럼 공동 노력을 기울일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일본 대마도 여행, 고운 모래가 일품인 미우다 해수욕장. /050913 임현동

일본 대마도 여행, 고운 모래가 일품인 미우다 해수욕장. /050913 임현동

최근 한일 관계가 정부 수립 후 역대 최악이라는 평이 나올 정도입니다. 위안부 관련 합의 취소와 징용에 대한 대법원 판결, 초계기·레이더 논란 등을 놓고 양국 간 긴장감이 높아지는 가운데 정치권 인사들도 가시가 돋친 발언을 주고받고 있습니다.
이런 ‘공방’은 분명 각각의 국민에게 후련함을 던져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냉정히 말하자면 그만큼 해결의 실마리에서는 멀어지는 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고려 문종이 자존심이 없어서 '중풍'이라는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며 일본에 의사를 요청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또, 이장용이 단지 일본을 위해서 자신의 정치적 생명까지 걸면서 몽골의 계획을 지연시켰다고 생각하기도 어렵습니다. 이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했던 건 고려의 안정과 평화, 그리고 국익 아니었을까요.
현재의 갈등 국면에서 최전방 공격수처럼 뛰고 있는 양국 정치인이 한 번쯤 되새겨봤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이 기사는 김현우 『고려 문종의 의사파견 요청과 여일관계』, 남기학 『고려와 일본의 상호인식』, 윤용혁 『여원군의 일본침입을 둘러싼 몇 문제-1274년 1차 침입을 중심으로』를 참고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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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의 역사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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