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노재현칼럼

김진경이 설 자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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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시인이자 동화작가, 그리고 교육운동가로도 알려진 김진경(53)씨가 지난해 5월 청와대 교육문화비서관에 내정되자 한 신문은 사설에서 '이 정권은…능력있는 사람을 끌어내리는 평등교육의 깃발로 평등사회를 실현시키고, 그 결과 우리 자손들이 중국인 사장, 일본인 공장장 아래 굽실거려야 살 수 있는 그런 부끄러운 나라, 부끄러운 시대를 만들 작정인가'라고 따졌다. 전교조 초대 정책실장을 맡았던 김씨의 이력이 그 근거였다.

보수 성향 신문을 지레 걱정하게 만들었던 김씨는 그러나 지난달 "전교조는 교원평가나 방과 후 학교에 대해 대안도 없이 반대하지 말라. 어른이 되어라"며 자신이 산파 역할을 한 조직에 직격탄을 날렸다. 청와대 비서관 직을 그만둠으로써 '입'이 자유로워진 지 두 달 만이었다.

전교조가 발끈해 나서고, 일선 교사들이 술렁이는 등 사회적 파문이 커졌다. 전교조 일각에선 김씨를 배신자로 여기는 분위기마저 생겼다. 앞서 인용한 신문과 평소 논조가 정반대이던 다른 신문은 사설에서 이례적으로 '(전교조는) 교사의 이익만 대변한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찬물을 뒤집어 쓴 전교조가 김진경씨에게 공개 토론을 하자고 제안했지만 그는 "한 개인이 조직과 토론을 벌이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며 지방으로 떠나 버렸다.

5일 오후 서울에 다니러 온 김씨를 종로의 찻집에서 만났다. 그는 전교조에 대한 자신의 발언이 "평소 갖고 있던 생각일 뿐"이라고 말했다. 하고 싶은 얘기는 더 많아 보였다.

-보수.진보 양쪽에서 지청구를 들어 보니 어떤가.

"욕 좀 얻어듣는 건 괜찮다. 문제는 어떤 논의가 시작되자마자 상대에게 딱지를 붙여 규정해 버리는 풍토다. 진보든 보수든 마찬가지다. 객관적 상황이 변했는데 사고의 틀은 냉전시대를 못 벗어났다. 민주화되면서 갈등도 극대화됐는데, 지식인들이 그걸 풀어 주는 역할을 못 하고 있다."

-중간지대가 없다는 말인가.

"그렇다. 지식인들이 의제를 설정할 때 이해관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것 같다. 민주주의의 합리적인 절차나 과정을 무시하고 요구만 한다. 이런 상황에선 발언이나 문제 제기 자체를 못하게 된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보자. 한쪽에선 무조건 '신자유주의'라고 비난하고, 다른 쪽은 '그거 안 하면 한.미관계 깨진다'고 한다. 객관적인 자료를 내놓지 않고 준비된 주장만 앞세운다."

-노무현 정권이 워낙 서툴러 사사건건 비판받는 것 아니겠나.

"이대로라면 한나라당이 정권을 잡더라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진보든 보수든 무엇이 합리적인지를 놓고 고민하면 좋겠다. 지금은 지식인들이 양 극단에서 국민의 눈을 흐리는 짓만 한다. 사회적 권위는 지식인들이 세워야 하는 것 아닌가. 간단하게 노무현 욕 한번 하고 자기 책임을 면제받으려는 지식인들도 있다."

김진경씨는 "어디까지나 상상이지만"이라는 토를 달아 '합리성을 공통분모로 한 지식인 100인 위원회' 같은 것이 생기길 바란다고 말했다. 보수.진보 구별 말고 모여서 의논하되, 꼭 일치된 결론을 낼 필요도 없는 모임이라고 했다. 각자 나름대로 합리적인 주장과 근거를 내놓아 국민이 판단하도록 도와주면 그만이라고 했다.

"누가 다음 정권을 잡든, 이대로라면 한국 사회는 갈수록 위험해진다"는 김씨의 말에는 울림이 있다. 물렁뼈가 없으면 딱딱한 뼈들끼리 죽자사자 부딪다가 함께 바스러진다.

김진경씨는 6일 강원도 영월 시골집으로 떠났다. 15년의 교직 해직기간 끄트머리(1999년)에 마련한 거처다. 집 앞 500여 평의 밭에는 고구마.감자.옥수수가 자라고 있다. 그는 "요새 감자꽃이 아주 예쁘게 피었다"며 "앞으로 10년은 이곳에서 글만 쓰겠다"고 했다. 그가 글을 쓸 곳은 마련돼 있지만, 그의 안타까움을 대변할 장소나 집단은 아직 눈에 띄지 않는다.

노재현 문화·스포츠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