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그렇기로 여길 못 오르다니…. 하지만 이렇게 가파르고 매끈한 슬랩에서 요구되는 미세한 균형감은 나비 날갯짓 같은 바람에도 그만 무참히 깨어지고 만다. 하물며 두 치수 큰 아들녀석 신발 속에서 미끄러지는 발가락으로 무얼 할까? 열 한 번을 떨어지다 결국 그냥 내려온다. 이제껏 올랐던 것이 실력인 줄 알았더니 죄다 '신력'이었군, 쯧쯧.
태동기의 암벽등반이라 하면 모두 크랙등반이었으니 이렇게 살떨리는 슬랩을 등반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아마도 암벽화가 개발되면서부터가 아닐까? 주로 완력을 필요로 하는 크랙등반과는 달리 슬랩등반은 첨예한 암벽화를 주요 무기로 하는 절대적 균형과 집중력의 등반이다.
마치 발레화를 연상시키는 암벽화는 가파른 바위의 작고도 미세한 홀드(돌출부위)에 보다 효과적으로 체중을 싣고 지지를 받을 수 있도록 연구개발돼 왔다. 그것은 축구화나 러닝화처럼 소재와 모양에 있어 끊임없는 혁신을 추구하며 발전해온 과학이다. 현재와 같은 암벽화가 세계적으로 보급된 것이 1980년대 초라 하니 그 이전 불완전한 신발로 험난한 바위길을 올랐을 선배들의 투지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60,70년대에 소위 '워커'라 불리는 군화를 신고 인수봉 선인봉을 올랐던 선배들이야 전설 내지는 신화의 반열에 올려놓아야 마땅하겠지만, 80년대를 지나 간혹 90년대 초까지도 대학 산악부나 전통있는 산악회에서는 신참에게 1년 정도는 암벽화를 신지 못하도록 강제했다 한다. 그러니 열악한 신발로 산전수전 다 겪은 뒤, 마침내 암벽화를 신고 바위 앞에 섰을 때의 그 날아갈 듯한 감격이야 말로 어찌 다할까. 결국 내가 못 건 자일은 동료가 대신 걸었다. 내 못 간 데를 어찌 가나 보려고 목을 꺾고 바라보는데 두세 번 시도해 보더니 그냥 옆길로 빠져버린다. 크럭스(바위길에서 가장 어려운 구간)를 우회하여 재빠르게 볼트 세 개를 지나니 종료점이다. 오호라! 크럭스를 통과 못해도 목적지에는 갈 수 있군. 자존심 상하는 김에 '그렇게라면 나도 갔다'라고 해야 할까? 아니다. 이것은 누가 옳고 그른가의 문제가 아니다. 그와 나는 다만 다를 뿐인 것이다. 그리하여 자일을 걸고 호기롭게 하강하는 그에게 박수를 쳐주었다. 훌륭합니다. 훌륭해요.
주미경 등반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