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권혁주 논설위원이 간다

중국의 양자 기술, 미국에 ‘스푸트니크 충격’을 던지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권혁주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양자정보 헤게모니 전쟁

IBM이 개발한 양자컴퓨터. 미국에서는 IBM·구글 등 IT 공룡들이 양자컴퓨터 개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중앙포토]

IBM이 개발한 양자컴퓨터. 미국에서는 IBM·구글 등 IT 공룡들이 양자컴퓨터 개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중앙포토]

중국이 일을 냈다. 과학기술로 미국의 자부심을 꺾었다. 우주개발이 아닌데도 미국 일각에서 “옛 소련의 스푸트니크 인공위성 발사에 맞먹는 충격”이라는 반응이 나왔다. 미국 의회는 들끓었다. 중국의 행보를 분석하는 정책 청문회가 열렸다. ‘이 분야 기술의 발달이 국가 안보와 경제에 미칠 파장을 예의 주시해야 한다’는 의회 보고서도 나왔다. 의회가 움직여 해당 과학기술에 대한 진흥 법안이 지난해 마련됐다. 하원에서는 찬성 384대 반대 11, 상원에서는 만장일치로 통과했다. AP통신은 “둘로 갈라졌던 미국 정계가 여기서만큼은 하나로 뭉쳤다”고 보도했다.

암호·보안 체계 뒤바꿀 기술 #중국이 세계 최초 개발·시현 #뒤처지면 안보에 심각한 위협 #각국 개발 경쟁 속 한국은 걸음마

미국을 화들짝 놀라게 한 분야는 바로 ‘양자정보기술’이다. 원자나 전자처럼 아주 작은 입자들이 보이는 특수한 행동을 기반으로 한다. 이 기술이 발전해 등장할 ‘양자컴퓨터’는 계산 능력이 엄청나다는 것이 이론적으로 입증됐다. 특히나 지금의 금융·통신 암호를 풀어내는 능력은 압도적이다. “‘암호 깨기’에 관한 한, 양자컴퓨터와 수퍼컴퓨터는 수퍼컴퓨터와 주판 만큼 차이 난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고등과학원 김재완 교수는 “우주가 탄생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수퍼컴퓨터를 돌려도 못 풀 암호를 양자컴퓨터는 몇 시간 안에 풀 수 있다”고 말했다. 현재의 암호 체계를 완전히 무력화시킬 기술이란 얘기다.

미국에서 양자컴퓨터 벤처 아이온큐(Ion Q)를 설립한 김정상 듀크대 교수. [사진 아이온큐]

미국에서 양자컴퓨터 벤처 아이온큐(Ion Q)를 설립한 김정상 듀크대 교수. [사진 아이온큐]

양자컴퓨터가 강력한 암호 풀이 성능을 발휘하는 원리는.
“양자컴퓨터 연산의 기본 단위는 ‘큐비트(qubit·quantum bit)’라는 것이다. 일반 컴퓨터의 ‘비트(bit)’에 해당한다고 보면 된다. 양자컴퓨터는 큐비트가 하나 늘어날 때마다 계산 능력이 2배가 된다. 큐비트가 10개면 하나보다 계산 능력이 약 1000배, 50개면 1000조 배가 된다. 기하급수적인 증가다. 그래서 암호 풀이 같은 복잡한 연산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
금융·통신을 포함한 온갖 보안 시스템에 엄청난 위협이다.
“현실화되면 그렇다. 초보 단계 양자컴퓨터가 나오고 있으나 암호를 풀 정도로 상용화하기까지는 길이 멀다. 아주 작은 양자의 세계를 제대로 다룰 수 있는 기술이 아직 부족하다.”
그런데 왜 미국이 난리였나.
“양자 기술은 창이자 방패다. 병 주고 약 준다. 암호를 깰 수도 있고, 지금과 전혀 다른 양자암호 체계를 내놓을 수도 있다. 일종의 방어망이다. 중국이 시현한 게 양자암호다. 이로 인해 양자기술 헤게모니 전쟁에 불이 붙었다.”

중국은 2016년 인공위성 모쯔(墨子)를 쏘아 올렸다. 그러곤 지상과 양자 암호 처리된 교신을 했다. 이듬해엔 베이징(北京)에서 상하이(上海)까지 약 2000km를 잇는 양자 암호 통신망을 설치했다. 지난해에는 베이징과 오스트리아 빈을 양자 암호 망으로 연결해 화상 회의까지 했다. 이게 미국을 흔들었다. 경제지 포브스는 “중국이 해킹 불가능한 양자 통신 네트워크에서 세계를 선도하고 있다”고 했다. 미국은 창(양자컴퓨터)도 방패(양자암호 기술)도 없는데 중국은 일단 방패를 갖춘 셈이다. 중국이 언제 창마저 갖출지 모를 일이었다.

미국에서는 “안보에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여론이 고개를 들었다. 미국 정부와 의회는 세계의 동향을 면밀히 살피기 시작했다. 중국은 약 1조원을 들여 2020년까지 국가양자연구센터를 짓고 있었다. 동시에 전 세계의 양자기술 인력을 중국으로 끌어들였다. 중국인뿐 아니라 외국인 연구진까지 망라했다. 미국 메릴랜드대에 있던 한국인 김기환 박사도 초빙을 받아 중국 칭화(淸華)대 교수가 됐다.

아이온 큐는 양자 컴퓨터 핵심 소자를 개발하고 있다. [사진 아이온큐]

아이온 큐는 양자 컴퓨터 핵심 소자를 개발하고 있다. [사진 아이온큐]

유럽도 움직였다. 2016년 유럽연합(EU) 차원에서 양자기술 진흥계획을 세웠다. 지난해에는 10년간 총 10억 유로(약 1조3000억원)를 투자한다는 ‘양자기술 플래그십 프로그램’을 발표했다. 그러면서 “유럽이 미래 산업의 리더가 되도록 하겠다”고 했다. 실제 양자기술은 보안뿐 아니라 경제 파급효과 또한 막대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신약 개발 분야가 대표적이다. 복잡한 화합물 분자가 어떤 성질을 띠는지 시뮬레이션하는 데 양자컴퓨터가 탁월하다는 점이 이론적으로 입증됐다. 암호 찾기와 마찬가지로 수퍼컴퓨터로는 불가능한 분야다. 이를 이용하면 원자들을 조합해 특정 증상을 치료하는 약물을 찾아낼 수 있다.

EU·중국에 비해 미국 정부는 상대적으로 굼떴다. IBM·구글·마이크로소프트·인텔 같은 IT 기업들이 제각기 양자컴퓨터 개발에 나서고 있을 뿐, 정부 정책은 존재가 희미하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심지어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연설이 필요하다”고까지 했다. 케네디 대통령이“우리는 달에 갈 것이다”라는 연설로 스푸트니크 쇼크를 극복하고 우주개발 헤게모니를 쥐었듯, 양자기술 패권을 장악할 전기가 필요하다는 얘기였다.

결국 의회가 ‘국가 양자 이니셔티브(NQI) 법안’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법안은 압도적인 지지로 상·하원을 통과했고, 지난해 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서명했다. 미국 정부는 앞으로 5년간 양자 기술에 12억7500만 달러(약 1조5000억원)를 투자하기로 했다. 손꼽히는 양자 기술 연구자인 미국 듀크대 김정상 교수는 “자칫 미국이 뒤처질 수 있다는 생각이 법안을 탄생시켰다”고 말했다. 그는 양자컴퓨터 기술 벤처 ‘아이온 큐(Ion Q)’를 미국 현지에 세워 2200만 달러(약 260억원)를 투자받았다.

NQI법에 보면 미국은 대통령 자문위원회까지 만들도록 했다.
“‘국가 나노기술 이니셔티브(2003년)’에서 대통령 자문기구를 두도록 한 뒤로 과학기술 분야 자문위는 처음인 것 같다. 양자정보가 그만큼 전략적으로 중요하다는 의미다.”
보안 위협은 어느 정도인가.
“양자 컴퓨터가 나오면 기존의 암호 체계는 한 방에 무너질 수 있다. 미국 국가안전보장국(NSA)이 전 세계에 대책을 공식 촉구했다.”
현재의 암호를 풀어 젖힐 양자컴퓨터가 나오려면 아직 오래 기다려야 한다던데.
“그렇다. 내 생각에 10년 안에는 힘들 것 같다. 하지만 안전한 암호 체계를 개발해 금융·통신 등의 분야에 완전히 대체 적용하는데도 10~20년이 걸린다. NSA가 지금부터 대책을 서두르는 이유다.”
벤처를 세워 투자받았는데, 상용 제품을 내놓으려면 10년 이상 기다려야 한다는 얘기로 들린다.
“암호보다 (신약 개발 등에 응용 가능한) 물질 시뮬레이션 등이 더 빨리 될 거다. 앞으로 2~5년 사이에 수퍼컴퓨터로 불가능한 시뮬레이션을 해내는 게 목표다.”

미국·중국·EU만 양자정보에 열을 올리는 게 아니다. 독일·영국·네덜란드는 EU와 별개로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캐나다·호주·이스라엘·싱가포르도 일찌감치 양자정보 기술의 중요성에 눈을 떴다. 일본은 세계 최초로 양자컴퓨터용 큐비트를 개발하는 저력을 보였다. 자체 기술을 확보하지 않으면 국가 안보에 심각한 위협이 발생할 수 있다는 판단이 작용했다.

반면 한국은 이제 걸음마다. 올 초에야 정부가 양자컴퓨터 핵심기술 개발 사업을 발표했다. 올해 60억원, 5년간 총 445억원을 투자한다는 내용이다. 1조원 넘게 투자하는 미국·중국·EU와는 비교하기 힘든 규모다. 연구 과제 공모에 들어간 게 불과 2주 전이다. 토양이 척박해 연구 인력도 부족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해외 석학들은 ‘양자 컴퓨팅 중장기 추진전략 기획연구’를 수행한 한국표준연구원에 “외국 선도 그룹과 격차를 줄이기 위해 집중 투자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한마디로 선택과 집중이다. 양자정보 가운데 한국이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핵심 분야를 선정해 잘하는 연구 그룹 몇몇을 밀어주라는 의미다. 부족한 연구비로 ‘패스트 팔로워’가 되기 위한 기본 전략이다. 걸림돌은 좋게 표현해 ‘공평무사’ 주의가 번진 국내 연구 풍토다. 이를 극복하고 양자정보 과학기술의 패스트 팔로워가 되려면 선택과 집중을 하려는 정부의 결단이 필요하다.

권혁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