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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슈바이처’ 이종욱 전 WHO 총장, "모든 가능성을 넓게 열어두던 사람"

중앙일보

입력

23일 오후 고 이종욱 전 WHO 사무총장의 부인 가부라키 레이코 여사를 서울시내 한 호텔에서 만나 얘기를 나눴다. [사진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 제공]

23일 오후 고 이종욱 전 WHO 사무총장의 부인 가부라키 레이코 여사를 서울시내 한 호텔에서 만나 얘기를 나눴다. [사진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 제공]

“모든 가능성을 넓게 열어두던 사람으로, ‘이것 때문에 못한다’는 핑계를 대지 않던 사람이다”

부인 가부라키 레이코 인터뷰

23일 오후에 만난 가부라키 레이코(74) 여사는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 고(故) 이종욱 전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을 이렇게 기억했다. 레이코 여사는 “나는 앞으로 나아가기를 어려워하는 사람인데 남편은 그와 반대로 추진력이 있던 사람”이라며 “그는 장애물이 생기면 포기하지 않고 그걸 넘어 앞으로 나아갔다”고 회상했다.

현장을 누비던 ‘백신의 황제’  

고 이종욱 전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 [중앙포토]

고 이종욱 전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 [중앙포토]

이 전 총장은 2003년 한국인 최초로 유엔(UN) 산하 국제기구 수장에 오른 인물이다. 서울대 의대를 졸업했으나 의사로서의 안정된 지위를 버리고 감염병 퇴치에 자신을 바쳐 ‘아시아의 슈바이처’라 불렸다. 그는 남태평양의 사모아섬 병원에서 일하면서 한센병과 소아마비 환자를 주로 돌봤다. 그러던 중 1983년 WHO와 처음 인연을 맺었고 이후 백신국장으로 재직하며 소아마비 발생률을 1만명당 1명 이하로 떨어뜨리기도 했다. 사무총장 취임 이후에는 ‘24시 위기대응 상황실’ 만들어 전 세계 보건이슈에 실시간 대처하고, 본인은 1년에 150일ㆍ300,000km의 출장을 다녔다. 그러던 중 2006년 세계보건총회 첫날 뇌졸중으로 쓰러져 사망했다. 그와 함께 일했던 이들은 이 전 총장을 ‘Man of Action’(행동하는 사람)이라 불렀다.

"페루 여성 자립 돕고 있어…남편은 최대 후원자"

이 전 총장의 부인인 레이코 여사는 17년째 페루의 수도 리마의 북쪽에 있는 가난한 마을에서 바느질 공방을 운영하고 있다. 여성들에게 직접 바느질을 가르쳐 알파카 털로 목도리, 손장갑 등을 만들어 팔고 이 돈을 통해 여성들의 자립을 돕는다. 레이코 여사의 숙소에서 공방까지 거리는 왕복 4시간 남짓. 레이코 여사는 일흔이 넘은 나이에 이 거리를 일주일에 4번씩 다닌다고 한다. 레이코 여사는 쑥쓰러운듯 웃으며 “할 수 있는 만큼 해 보자”라는 마음으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

남편인 이 전 총장은 레이코 여사의 최대 후원자였다. 2000년대 초반 난민 문제에 관심을 가진 레이코 여사가 “나도 밖에 나가서 일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자 이 전 총장은 친구였던 김용 세계은행 총재를 통해 레이코 여사가 페루에 갈 수 있게 주선했다. 레이코 여사에 따르면, 처음 페루에 갔을 때 알파카 털이 너무 비싸 재료를 살 돈이 없었다고 한다. 이 때 남편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이 전 총장은 흔쾌히 도움을 줬다. 레이코 여사는 “처음에는 남편에게 재료값을 100% 도움받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공방에서 스스로 마련할 수 있게 됐다”며 “한동안 100% 자립이 가능했지만, 요즘은 다시 힘에 부친다”고 말했다. 현재 공방에서 만들어지는 생산물은 1년에 2000만원 어치 정도다.

27년을 함께한 이 전 총장과 레이코 여사는 1976년 안양시 나자로 마을에서 한센병 환자를 돌보며 처음 만났다. 레이코 여사에 따르면, 일본에서 한국까지 봉사하러 온 레이코 여사에 대해 이 전 총장은 “예쁘고 마음씨도 고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레이코 여사는 “당시 크게 아팠던 나에게 남편이 ‘결혼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며 “나는 ‘나병에 걸렸을지도 모른다’고 거절했는데 남편은 ‘내가 고쳐줄 테니 걱정 말라’고 청혼했다”며 미소 지었다.

“옳다고 생각하면 바로 행동하라”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 등이 주관하는 ‘이종욱 제6대 WHO 사무총장 그는 누구인가’ 행사에서 반기문 전 UN 사무총장이 발언하고있다. 권유진 기자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 등이 주관하는 ‘이종욱 제6대 WHO 사무총장 그는 누구인가’ 행사에서 반기문 전 UN 사무총장이 발언하고있다. 권유진 기자

23일 오후 이 전 총장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모였다.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 등이 주관하는 ‘이종욱 제6대 WHO 사무총장 그는 누구인가’ 행사 자리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이 전 총장께서는 소아마비와 에이즈를 퇴치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셨다”며 “이 전 총장이 생전 말씀하신 ‘치료 방법이 있는데도 치료를 받지 못해 목숨을 잃는 사람이 있으면 안 된다’는 철학이 실현되고 있다”고 밝혔다. 손명세 연세대 교수는 “이 전 총장이 사무총장으로 재직하며 ‘3관왕’을 했다”며 “15년 동안 한 번도 올리지 못한 국가별 기여금을 20% 올렸고, 담배 규제에 관한 기본 협약 발효시켰으며 사스 등의 글로벌 전염병을 막을 수 있는 국제보건규약(IHR)을 발효시켰다”고 업적을 기렸다. 권진욱 보건복지부 건강정책국장은 “총장님께서 ‘옳다고 생각하면 바로 행동하라’는 말씀을 해 주신 게 굉장히 인상 깊었다”며 “‘안 된다고 생각하면 안 되지만, 된다고 생각하고 벽을 하나씩 넘어가면 할 수 있다’고 늘 말씀하셨다”고 회고했다.

권유진 기자 kwen.y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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