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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막의 봄, 수도 밸브를 여니 얼었던 물이 아우성치며 나온다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권대욱의 산막일기(27)

산막에서 한잠 푹 자고 일어나, 집에 봄을 맞을 준비를 했다. 잠을 잘 자서 그런지 마음이 가뿐했다. [사진 권대욱]

산막에서 한잠 푹 자고 일어나, 집에 봄을 맞을 준비를 했다. 잠을 잘 자서 그런지 마음이 가뿐했다. [사진 권대욱]

밤늦게 산막에 와 한잠을 잘 잤다. 잠이 보약이란 말 그대로 가뿐한 마음으로 일어나 데크며 벤치며 원두막이며 쓸고 닦고 봄맞이 손님맞이 채비를 한다. 분수도 틀고 오디오도 점검하고 곳곳에 쌓인 먼지며 낙엽이며 모두 모아 솔가지와 함께 겨울을 태운다.

제비꽃을 보고 어린 새의 재잘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꽃 잔디의 우렁한 빛을 보니 이제 바야흐로 봄이 왔다. 개울 건너 과수원에는 부지런한 농부의 손놀림이 재바르고, 곡우는 며칠 배운 가드닝으로 조팝나무 가지를 치니 머지않아 조팝꽃 복사꽃 울긋불긋 핀 꽃 대궐을 볼 것이다. 사방이 봄이다. 나는 드디어 원두막에 오른다.

연못 물 끌기 프로젝트

곡우가 조팝나무 가지를 쳤다. 곧 조팝꽃, 복사꽃으로 사방이 알록달록한 봄 천지가 될 것이다. [사진 권대욱]

곡우가 조팝나무 가지를 쳤다. 곧 조팝꽃, 복사꽃으로 사방이 알록달록한 봄 천지가 될 것이다. [사진 권대욱]

산막 독서당 뒤에 졸졸 흐르는 물줄기 하나가 있다. 늘 많이 흐르지는 않지만 끊이는 법은 없어 계절 관계없이 책 읽을 때면 동무가 되어준다. 이 물이 독서당 아래 연못으로 연결되기는 하나 맨땅이다 보니 이리저리 손실이 커 못을 채우기엔 부족함이 많다. 하여 15년 전 분수대 만들던 신공으로 연못 물 끌기 프로젝트를 계획한다.

우선 개거냐 암거냐를 생각한다. 개거가 흐르는 물을 볼 수 있어 좋긴 하나 자재 수배와 시공이 만만치 않다. 일단 고려대상에서 제외하고 집수정+파이프라인으로 계획한다. 이것이 무슨 리비아 대수로 공사도 아니고 그저 적절한 집수정(장마나 홍수 때 떠내려가지 않을 묵직한 놈으로) 하나 구하고 집수정 토출구에 파이프를 연결해 연못 돌 위로 떨어뜨리면 되지만 막상 시행하려면 이것저것 고려할 일이 많다.

우선 파이프의 재질과 구경을 정해야 하는데 겨울에도 얼어 터지지 않아야 하고 최대 토출량을 커버할 만한 구경이어야 한다. 파이프 재질은 흑색 고무관 또는 PVC가 좋을 듯하고 용량은 50mm면 충분할 듯하다.

자, 계획은 세웠으니 실행만 하면 된다. 그러나 막상 자재 수배하려면 읍내까지 나가야 하는데 일요일이라 문 연 곳이 있을지 모르겠고 마음만 급해진다. 지금 이 시각에도 물은 흐른다. 아무런 효용 없이 그냥 낭비되는 물 보고 있자니 속이 터진다. 그까짓 물 뭐가 그리 귀한가 하겠지만 내게는 황금보다 귀한 물이다. 급한 마음에 정 박사 아우에게 전화하고 부탁한다. 제발 오늘 중에 마치면 좋겠다. 아우야 빨리 온나!

봄의 산막은 손볼 것이 많다. 낙엽과 솔가지를 모아 치우고, 연못 공사도 해야 한다. 이런 많은 일들을 우리 부부 둘이서만 해내지 못하기에, 고마운 이웃의 도움을 받기도 한다. [사진 권대욱]

봄의 산막은 손볼 것이 많다. 낙엽과 솔가지를 모아 치우고, 연못 공사도 해야 한다. 이런 많은 일들을 우리 부부 둘이서만 해내지 못하기에, 고마운 이웃의 도움을 받기도 한다. [사진 권대욱]

산막엔 늘 일이 많다. 계절이 바뀌는 봄철엔 특히 그렇다. 이때쯤이면 억만금 주는 사람보다 일손 도와주는 사람이 제일 고맙고 귀하다. 오늘 산막은 고마운 친구들 덕에 멋지게 봄 단장을 했다. 우리 부부로서는 엄두도 못 낼 일이라 차일피일 미루었었는데 큰 숙제를 마친 기분이다. 낙엽을 긁고 잔가지들을 치고 회양목을 다듬고 그들을 모아 태워버리고 먼지투성이들인 신발들을 씻어 말리고 백일홍을 심고, 그렇게 겨울을 태우고 봄을 심었다. 고맙다 친구들.

봄에는 모든 걸 점검한다. 야외 부엌의 수도도 연결하고 온수기 드레인도 닫고 2층 수도도 연결하고 닫았던 밸브도 활짝 연다. 분수도 튼다. 겨우내 꽁꽁 얼었던 물이 아우성치며 화장실이며 주방이며 욕실이며 마구마구 터져 나올 때, 비로소 산막은 기지개를 켜고 손님 맞을 채비를 한다.

얼마나 혹독했던지, 지난겨울은 관로 속 밸브 속에 남아 있던 물이 얼고 팽창하며 갈 곳 몰라 헤매다 공고한 쇠를 깨부술 정도의 힘이었다. 수전도 터지고 욕실의 샤워기도 터지고. 꼬마 전열등이라도 달아두는 수밖에.

독서당에서 새벽 독서

산막 길이 크게 달라졌지만 아직 구불구불 울퉁불퉁하다. 물길까지 있으니 질주본능이 자극된다. [사진 권대욱]

산막 길이 크게 달라졌지만 아직 구불구불 울퉁불퉁하다. 물길까지 있으니 질주본능이 자극된다. [사진 권대욱]

산막에 빼놓을 수 없는 것 중에 독서가 있다. 새벽 4시, 사방은 고요하고 들리느니 물소리 새소리뿐인 좋은 시간이다. 날은 춥고 바람은 거세지만 이곳 독서당의 독서는 한 줄 읽고 온종일 생각하게 하는 독특한 품위가 있다. 히터를 켜고 바닥을 덥히고 최적의 독서 환경을 만든다.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물처럼 바람처럼 읽는 편이지만 때로는 특정 주제에 집중하기도 한다.

산막 길이 크게 달라졌지만, 아직도 구불구불 울퉁불퉁하다. 게다가 물길까지 있으니 오프로드 질주본능을 크게 자극한다. 달리고 싶었지만, 곡우와는 어림도 없는 일이라 홀로 차를 몰고 짜릿하게 달려본다. 계곡 물길을 거침없이 가르는 이 자유는 무애지지(無碍之地, 걸림 없는 자유의 땅)가 주는 또 하나의 선물이다. 이런 글들 모아 더하고 빼고 붙이면 산막일기가 된다. 보는 것, 듣는 것, 행하는 것, 거기에 생각하는 그 모든 것조차 산막일기의 재료일 테니 쓸 것 없는 걱정은 안 하겠다.

뉘라서 시켜 이 짓을 하랴. 제 좋아서 하는 일 말릴 자가 있겠는가. 나는 집을 짓고 닭장을 짓는 게 아니다. 산막스쿨은 체계도 없고 정해진 커리큘럼도 없다. 누구나 다 선생이 되고 누구나 다 학생이 되며, 무엇이든 과목이 되는 학교다. 다만 하룻밤 지나고 나면 이제까지 잘 살아왔지만, 지금부턴 더 잘 살아야겠다는 결심 하나로 족하다. 나는 그런 그 산막스쿨을 만들고 있는 거다.

권대욱 ㈜휴넷 회장·청춘합장단 단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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