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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염 기른 기장 vs 면도 요구한 항공사… 누가 정당한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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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더,오래] 김용우의 갑을전쟁(8)

'같은 사업장에서 같은 일을 할 경우 같은 임금을 지급한다'는 구 남녀고용평등법에서 처음 명시된 후 30년간 이어진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원칙'이다. [사진 pixabay]

'같은 사업장에서 같은 일을 할 경우 같은 임금을 지급한다'는 구 남녀고용평등법에서 처음 명시된 후 30년간 이어진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원칙'이다. [사진 pixabay]

‘같은 사업장에서 같은 일을 할 경우 같은 임금을 지급한다.’ 1989년 구 남녀고용평등법에서 처음 명시된 후 30년간 이어진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원칙’입니다. 이에 근거해 사업주는 합리적인 이유 없이 정규직 여부, 성별을 구분해 임금을 차등 지급하면 안 되지요. 위반한 경우 형사책임까지 질 수 있는 근거도 마련돼 있습니다.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 제8조 제1항. [제작 조혜미]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 제8조 제1항. [제작 조혜미]

임대사업 하는 시간강사 임금 차별은 불법

최근 한 대학교가 전업과 비전업을 구분해 시간강사료를 차등지급했다가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원칙’에 어긋난다고 대법원이 판단한 사례부터 볼까요. 지방국립대 소속 음악과 시간강사인 A는 매월 8시간씩 강의했고, 대학은 임용 당시 강사를 전업으로 한다고 밝힌 그에게 시간당 8만원의 강사료를 책정했지요. 비전업 강사가 시간당 3만원을 받았던 것과 비교하면 두 배 넘는 수준이었던 겁니다.

그런데 대학에서 A의 건강보험료를 납부하며 그에게 별도의 부동산임대 수입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전업이 아니었다고 판단한 학교 측은 A에게 2014년 3월 지급한 강사료 64만원 가운데 40만원을 반환하라고 통보했지요. 2014년 4~5월의 강사료도 비전업 강사료에 준해 지급했습니다.

A는 학교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지요. 학교 측은 나름의 이유를 주장했습니다. 한정된 예산 범위 안에서 강의 수입만으로 생계를 이어야 하는 전업 강사의 처우 개선이 우선이기 때문에 차등 지급이 정당하다는 설명이었습니다. 1심과 2심은 학교의 손을 들어줬는데요. 학교와 체결한 근로계약에 이미 이 사실이 적시돼 있다는 점도 A에게 불리하게 작용했습니다.

시간강사 A는 부동산 임대 수입이 있다는 이유로 대학으로부터 강사료를 반환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사진 pixabay]

시간강사 A는 부동산 임대 수입이 있다는 이유로 대학으로부터 강사료를 반환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사진 pixabay]

사건이 대법원으로 올라가자 전세는 역전됩니다. 무려 3년 반에 걸친 숙고 끝에 대법원은 A의 손을 들어주고 2심에 사건을 되돌려 보냈지요(대법원 2019. 3. 14 선고 2015두46321 판결). 학교가 주장한 재정 상황은 시간강사의 근로와 무관하다는 게 대법원의 판단이었습니다.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원칙’의 예외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지요.

A에게 임대수입이 있다 치더라도 시간강사 작업에 전념할 수 있다는 점도 강조했습니다. 한마디로 근로조건과 무관한 사정을 들어 임금 등 근로조건을 차별하지 말라는 취지였지요. 다만 여기서 염두에 두어야 할 점도 있습니다.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원칙’에 따라 차별이 금지되는 건 ‘동일가치’의 노동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노동의 가치가 다르다면 임금을 달리 책정해도 무방하단 얘기가 되겠지요.

다른 사례를 볼까요. 전자부품 제조, 판매 회사에 일용직 주부 사원으로 입사한 뒤 시간제 사원으로 전환된 B는 공정이 끝난 부품 표면의 이물질 등을 제거하고 일정량을 정렬해 전기로에 넣을 수 있도록 준비하는 작업을 맡았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임금이 동료 남자 직원의 것과 비교해 82% 수준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그는 여자이고 비정규직(시간제)이란 이유 탓에 자신이 부당한 차별을 받았다고 주장하며 회사를 상대로 남자 직원과의 임금차액을 지급하라는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B가 간과한 사실이 있었지요. 남자 직원들의 경우 ‘전기로를 가동’하거나 ‘물품을 출하’하는 업무를 담당했던 겁니다. 3번에 걸친 재판에서 결국 그는 패소했습니다.

20~25%가량의 제품만을 대상으로 하는 B의 작업과 달리 남자 직원들은 모든 제품을 취급할 뿐 아니라 장시간의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등 책임이 중한 핵심작업을 맡았다는 판단에 따른 결과였지요. 즉 B의 노동과 남자 직원들의 노동은 가치 측면에서 다르게 책정된다는 겁니다(대법원 2013. 3. 14 선고 2010다101011 판결).

3월 8일 세계여성의 날, 오후 3시 '조기퇴근시위' 참가자들이 한국의 남녀임금격차가 100 대 64 비율로 차이가 난다며 항의의 뜻으로 시위를 하는 모습. [연합뉴스]

3월 8일 세계여성의 날, 오후 3시 '조기퇴근시위' 참가자들이 한국의 남녀임금격차가 100 대 64 비율로 차이가 난다며 항의의 뜻으로 시위를 하는 모습. [연합뉴스]

임금뿐 아니라 직원들을 상대로 근로조건을 부당하게 달리 두는 것도 차별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항공사 기장인 C의 경우를 볼까요. 그는 턱수염을 기르고 있었는데 이는 청결한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항공사의 용모규정에 어긋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면도를 하라는 상관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취향을 고집했는데요.

결국 항공사는 C의 비행업무를 정지시켰고 C는 즉각 반발했습니다. 외국인 직원에겐 혐오감을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수염을 기를 수 있다고 항공사가 규정한 것을 근거로 들어 부당하게 자신을 차별한다며 노동청에 구제신청을 한 겁니다.

수염도 잘 기르면 고객에게 신뢰 줄 수도

결과는 어땠을까요. ‘용모의 다양성에 대한 사회 인식의 변화 등을 고려할 때 수염을 기른다고 반드시 고객에게 부정적인 인식과 영향을 끼친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며 대법원은 C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오히려 직원이 타인에게 혐오나 불쾌감을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깔끔하고 단정하게 수염을 기른다면 고객의 신뢰나 만족도 등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세련된 판단도 덧붙였지요(대법원 2018. 9. 13. 선고 2017두38560 판결).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원칙’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최근 국회에서 논의 중인 양성평등기본법 개정안(신용현 의원 등 11인 제안)에는 ‘양성평등 임금의 날’을 정하는 방안이 담겼는데요. 미국 등 선진국에서 하듯 여성가족부 장관이 매년 전년도 성별 임금 통계를 기초로 남성이 지난 1년간 받은 임금을 여성이 받으려면 다음 해 언제까지 일해야 하는지를 계산해 공표하자는 겁니다.

올해 세계 평균은 4월 2일이지만 한국은 이보다 조금 늦은 5월 23일이라고 하는데요. 봄이 오기 훨씬 전 ‘양성평등 임금의 날’을 맞이하길 바랍니다.

김용우 법무법인(유한) 바른 변호사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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