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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와 고이즈미의 미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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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퇴임을 석 달 앞둔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를 위해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이 마련한 작별 파티는 성대하기 이를 데 없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열성 팬인 고이즈미를 위해 자신의 전용기로 엘비스 생가 방문에 동행했다. 감격에 겨운 고이즈미는 체면 같은 건 잠시 접어두고 엘비스의 춤과 노래를 흉내 내는 파격을 선보였다. 고이즈미의 깜짝 공연을 지켜보는 부시 부부의 얼굴엔 흐뭇한 미소가 흘렀다.

현안 논의보다는 퍼포먼스에 치중했다는 느낌을 준 지난주 미.일 정상회담을 바라보는 한국 내 시선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엉킬 수밖에 없다. 미.일 밀월과 미묘한 한.미 관계를 비교하는 우려의 시각도, 일본의 미국 추종 외교가 어제오늘 일이냐며 평가절하하는 시각도 있을 것이다. "누가 뭐래도 야스쿠니 신사에 간다"는 고집불통, 소신을 위해서라면 승산 없는 싸움도 마다하지 않는 사무라이 이미지로만 알려진 고이즈미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한 놀라움도 섞여 있을 듯하다.

곰곰이 따져 보면 두 정상의 이번 이벤트는 치밀하게 준비된 각본에 따른 것이다. 거기에 고이즈미의 연기력 또는 타고난 끼가 발동해 연출의 효과가 극대화된 것이다. 그런 연출을 가능토록 한 것은 두 나라의 전략적 이해관계다. 부시와 고이즈미의 첫 만남부터 되짚어 보자.

2001년 6월, 취임 2개월의 초보 총리 고이즈미는 첫 외유로 미국 방문길에 오른다. 눈여겨볼 것은 회담 장소다. 미국 외교사에서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서의 회담은 매우 각별한 관계로만 한정된다. 그런데 부시 대통령이 일면식도 없던 고이즈미를 별장으로 안내했다. 전례 없던 일이었다. 왜 그랬을까. 초면이었으니 개인적인 친밀감은 아직 생기기 전이었다.

전임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 미.일 관계는 악화일로였다. 중국으로 눈을 돌린 클린턴 정권은 '전략적 동반자'란 용어를 써 가며 중국과 우호관계를 맺는 데 열중했다. 반면 일본에 대해서는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압력을 가했다. 하지만 부시 정권은 달랐다. 중국의 부상을 경계하기 위해 유럽에서 영국에 버금가는 역할을 일본에 맡겨야 한다는 내용의 '아미티지 보고서'가 새로운 아시아 전략의 근간으로 채택됐다. 그런 전략 아래 당시 회담의 기획을 맡았던 마이클 그린 국가안보회의 아시아 부장은 새로운 미.일 동맹 구축을 설득하는 회담장으로 캠프 데이비드를 골랐다. 그는 일본 국회의원의 비서 생활을 했던 지일파 관료다.

고이즈미는 그 의미를 간파했다. 헌법의 제약을 풀고 국제무대에서 안보 역할을 확대하려는 일본의 속셈에 미국의 새로운 아시아 전략은 둘도 없는 우군이었다. 두 정상이 첫 만남에서 의기투합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부시를 영화 '하이눈'의 게리 쿠퍼와 닮았다고 치켜세우고, 엘비스의 노래 제목(Love me tender)을 인용한 것은 사실 고이즈미가 첫 회담 때부터 우려먹었던 메뉴다.

그로부터 두 달여 만에 9.11테러가 터졌다. 일본은 재빨리 자위대 함정을 인도양으로 보내 미군의 급유를 맡았다. 이라크 전쟁 때는 위헌 논란을 무릅쓰고 무장한 육상자위대를 복구활동에 파견했다. 비록 전투에 가담하진 않았지만 그 순간 자위대 해외파견의 금기는 허물어졌다. 양국의 전략적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그렇게 다져진 두 정상의 관계는 열네 차례의 정상회담으로 이어졌다.

고이즈미 총리는 엘비스와 사무라이의 두 얼굴을 갖춘 정치인이다. 그는 적절한 연기력이 국가 지도자의 중요한 덕목 중 하나임을 이번 회담에서 보여주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엘비스 외교'의 이면을 읽는 것이다. 미국과 일본은 새로운 세계 질서를 짜기 위해 빠른 속도로 일심동체가 돼 가고 있다. 고이즈미와 부시는 작별의 순간까지 그런 메시지를 세계를 향해 던졌다.

예영준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