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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눕터뷰] 28억원 카메라 기부하겠다는 '미친 수집가' 문재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50여 년 수집한 카메라와 함께 누운 문재철 대표, 그가 손에 든 카메라는 1930년대에 사용된 의료용 카메라다. 전쟁 중에 다친 환자의 환부를 클로즈업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50여 년 수집한 카메라와 함께 누운 문재철 대표, 그가 손에 든 카메라는 1930년대에 사용된 의료용 카메라다. 전쟁 중에 다친 환자의 환부를 클로즈업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미리 알아본 바에 의하면,
이름은 문재철,
수집한 카메라가 1500여대,
50여 개국을 다니며 수십 년간 수집,
사진 찍는 작가이기도 하며,
주식회사 ‘한국창호자동화’의 대표라고 했다.

사실 눈으로 본 바 없는 1500여대의 카메라,
그것이 궁금하여 그에게 눕터뷰를 요청했다.

문재철 공간갤러리 입구, 경기 고양시 일산 주택가 지하에 있다.

문재철 공간갤러리 입구, 경기 고양시 일산 주택가 지하에 있다.

그가 오라고 한 장소가 특이했다.
경기 고양시 일산에 있는 ‘공간갤러리’이었다.
입구엔 갤러리로 되어있지만,
일반인이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공간이었다.
이곳 주인장의 사적인 공간이었다.

공간갤러리에 진열된 가구들, 모두 그가 직접 만든 것들이다.

공간갤러리에 진열된 가구들, 모두 그가 직접 만든 것들이다.

카메라보다 먼저 목제 가구, 도자기, 시계, 사진 등이 눈에 들어왔다.
하나하나가 독특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예사롭지 않은 가구들 뒤쪽에 카메라가 진열돼 있었다.
마치 비밀의 공간에 숨겨진 듯….

진열된 카메라가 1000여대다. 나머지는 다른 장소에 밀봉된 채로 보관되어 있다.

진열된 카메라가 1000여대다. 나머지는 다른 장소에 밀봉된 채로 보관되어 있다.

“언제부터 모으신 겁니까?”
“25살에 첫 월급 타서 카메라를 샀습니다.

이것저것 다 떼고 나면 월급이 3만원 정도였는데,
2만5000원 주고 카메라를 샀습니다.”

“그렇다면 수집인생 40년이 넘은 건가요?”
“제 나이가 예순여섯이니 벌써 40년이 넘었네요.

한 대씩 사서 잠 못 자던 게 엊그제 같은데….
제가 아무리 용돈이 떨어져도 한 대도 안 팔았어요.
한참 사춘기 때,
직장 생활 때,
연애할 때,
참 용돈 많이 필요할 때였는데도 안 팔았어요.
이건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그대로 두었죠.”

“사춘기 때면 중학생 때인데 그때부터 모으신 겁니까?”
“맞습니다. 그때부터입니다.”

그렇다면 어림잡아도 수집 인생 50년이 넘었다.
더구나 중학교 때부터 사진을 모은 내력,
참 독특한 내력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다시 한번 확인했다.

“정말 중학교 때부터 모은 겁니까?”
“그 당시 자동카메라가 처음 나왔어요.

누르면 필름이 감기고,
노출을 시각적으로 알려주는 카메라가 그때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비로소 35㎜ 필름 표준화가 정착된 겁니다.
35㎜ 카메라에 밀려난 120㎜ 필름용 카메라가 시골 사진관에도 제쳐져 있었습니다.
그때 수집한 걸 비닐에 싸서 딱 넣어 놓았어요.
지금도 있습니다.
그대로요.
그때 아마 다 팔았으면 정말 오래된 건 없었을 수도 있죠.
그 당시엔 흔하게 있었어요.
우리나라에 왠지 모르겠는데 카메라가 참 흔하게 있었어요.”

당시 가보 1호가 카메라인 시절이었다.
그러니 카메라가 귀하디귀한 시절이었는데.
그는 흔하게 있었다고 했다.
보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보였던 게다.
그것도 중학생이었던 그에게….

공간갤러리 한편에 마련된 카메라 수리 공간, 빈틈 없이 정리되어있다. 공간조차 '한뼘도 허투루 쓰지 않는다"고 그가 말했다.

공간갤러리 한편에 마련된 카메라 수리 공간, 빈틈 없이 정리되어있다. 공간조차 '한뼘도 허투루 쓰지 않는다"고 그가 말했다.

“그럴 만큼 카메라가 좋았습니까?”
“어릴 때부터 기계의 메커니즘에 굉장히 관심이 많았습니다.

중학교 때 고장 난 시계를 혼자 고칠 정도였습니다.
그때 이안 리플렉스카메라를 봤는데 거꾸로 보이는 세상이 너무 신기했습니다.”

“지금껏 이 많은 카메라를 모은 이야기를 들려주십시오.”

2012년 문 대표가 아프리카 에디오피아 오지에서 촬영한 '나무꾼 소녀'/ 문재철 제공

2012년 문 대표가 아프리카 에디오피아 오지에서 촬영한 '나무꾼 소녀'/ 문재철 제공

“세계 오지를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었습니다.

중국 장가계도 뗏목을 타고 원류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현지에 사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베트남 북부에서 하류로 쭉 내려오면서 40여개 부족의 원주민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수백 년 전 생활습관 그대로였습니다.
물론 언어도 안 통하고요.

아프리카도 교통수단으로 들어갈 수 없는 오지를 찾아가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이런 오지에 갈 때면 반드시 거쳐 지나는 도시 골목을 뒤졌습니다.
특히 해외 식민지를 거친 나라들,
아프리카, 남미, 베트남 등지를 돌아다니다 보면 난데없이 귀한 카메라가 나타났습니다.”

“모두 그렇게 사들이신 것들인가요?”
“아닙니다.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오지 사람들은 어떻게 보면 상대적 빈곤감을 못 느끼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돈이 필요 없는 사람들이니 돈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그런 삶에 속한 카메라는 하나같이 사연들이 있습니다.
사연 있는 카메라를 돈 준다고 해서 쉽사리 내주겠습니까?
이럴 땐, 이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살피고 그런 것들을 구해줍니다.
오토바이, 냉장고 이런 것들을 주면서 바꾸는 겁니다.”

“카메라 수리하는 법을 스위스에서 배운 게 맞습니까?”
"수리가 안 되면 수집이 안 됩니다.

고장이 난 걸 사 오면 고장 난 채로 두어야 하지 않습니까?
왜냐면 수리비가 구매가의 열 배, 스무 배도 더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남이 고쳐주는 건 맘에 들지도 않고요.
그래서 배운 겁니다.”

1층은 목제가구, 2층은 도자기를 만드는 공간이다. 카메라 수리뿐만 아니라 목제 가구, 목제 만년필, 볼펜, 샤프, 심지어 도자기까지 만든다. 그래서 그를 두고 '손끝에 귀신 붙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1층은 목제가구, 2층은 도자기를 만드는 공간이다. 카메라 수리뿐만 아니라 목제 가구, 목제 만년필, 볼펜, 샤프, 심지어 도자기까지 만든다. 그래서 그를 두고 '손끝에 귀신 붙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사업을 하면서 가능한 일입니까?”
“그 때는 그나마 체력이 되니까 그리 했습니다.

일주일에 3일 거기 있고, 다시 돌아와서 사업하고 그랬습니다.
지금 같았으면 못합니다.”

“그때가 언제쯤입니까?
“1990년쯤입니다. 

그때 경비행기 조종술도 배웠습니다.
우리나라 항공촬영법이 그렇게 까다로운 줄 알았으면 안 배웠을 겁니다.
외국처럼 면허증만 있으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면허증 따고 보니 턱도 없는 꿈이었습니다.”

2010년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시도된 헬기다 하단에 장착된 전후좌우 구동 짐벌도 문 대표가 직접 제작했다. /문재철 제공

2010년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시도된 헬기다 하단에 장착된 전후좌우 구동 짐벌도 문 대표가 직접 제작했다. /문재철 제공

“그래서 무선으로 조종하는 무인헬리콥터를 만드신 겁니까?”
2010년 문 대표가 고비사막 오아시스부근 에서 무인헬기로 찍은 석양풍경이다. /문재철 제공

2010년 문 대표가 고비사막 오아시스부근 에서 무인헬기로 찍은 석양풍경이다. /문재철 제공

“그건 2010년쯤입니다. 무선 조종 헬기를 제작해서 사진찍기 시작했습니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제가 했습니다.
쉽게 분해와 조립되도록 만들어서 사막에 가져가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때 좋은 사진 많이 찍었습니다.
남들이 볼 수 없는 앵글로 찍으니 ….
그런데 요즘은 안 찍습니다.
드론이 워낙 흔하디흔하니 딱 접었습니다.”

라이카 카메라를 분해해서 문 대표가 만든 조립도, 분해는 카메라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기본이니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했다.

라이카 카메라를 분해해서 문 대표가 만든 조립도, 분해는 카메라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기본이니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했다.

“그런데 스위스에서 카메라 수리를 배울 때 어렵지 않았습니까?”
“기계에 대한 기본적인 메커니즘을 알고 있으니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다만 예전 카메라들이 애프터서비스를 전제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사실 요즘은 연상설계라는 게 있습니다.
이를테면 요 부품은 여기 들어가지 않을까 하면 딱 들어맞는 연상 디자인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사후관리 생각 안 하고 만들었나 봅니다.
전혀 엉뚱한 곳에 엉뚱한 부품이 들어있습니다.
그걸 동영상으로 찍으면서 분해를 하지 않으면 절대로 되 맞추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왜 그리 수리에 집착하신 겁니까?”
“카메라가 카메라 기능을 못 하면 그건 카메라라고 할 수 없죠.”
카메라를 만질 때 끼는 문 대표의 장갑이 찢어져 있다. 늘 닦고 털고 만져주는 일의 흔적이다.

카메라를 만질 때 끼는 문 대표의 장갑이 찢어져 있다. 늘 닦고 털고 만져주는 일의 흔적이다.

“수리가 어떻게 보면 카메라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입니까?”
“그렇죠. 
수리뿐만 아니라 저 친구들은 계속 만져줘야 해요.

저 진열장에만 1000여대가 있습니다.
한 번씩 만져 주기도 바빠요.
사실 카메라라는 게 본연의 일이 사진을 찍는 겁니다.
누군가의 손에 들려서 뭔가를 계속 찍어야 하는 일이 쟤들이 할 일인 겁니다.
그러니 누가 찍어보고 싶다면 저는 빌려줍니다.
아무리 비싼 것이라도….
그게 카메라에는 이로운 일 이거든요.
저기 저렇게 진열되어 있다는 게 저 친구들에겐 미안한 일인 거죠.
매일 나오면 저기 가서 한마디씩 하고 옵니다.
오늘도 놀아 줄 시간이 없어서 미안하다고….”

그러면서 묻지도 않았는데 그가 눕터뷰에 응한 이유를 설명했다.

나찌군용 라이카 바르낙 , 1926년 제작된 제품 /문재철 제공

나찌군용 라이카 바르낙 , 1926년 제작된 제품 /문재철 제공

“제가 가끔 저기 가서 누워 있습니다.
누워서 쳐다보면 카메라를 살 때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그래서 눕터뷰와 감정이 통했습니다.

하나같이 이야기가 없는 카메라가 없습니다.
오래전 이야기입니다만,
유럽 시골 마을 마당에서 이슬 맺힌 장미꽃을 찍고 있는데 노부부가 들어 오라고 했습니다.
들어가서 보니 벽에 흑백 사진이 걸려 있었습니다.
외곽에 비네팅도 없고 상태가 너무 좋더라고요.
그래서 그 노부부에게 라이카로 찍은 사진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 부부가 굉장히 망설이다가 소장하던 카메라를 보여줬습니다.
뚜껑에 나치 문양이 있었습니다.
아직도 터부시하고 굉장히 조심스러워 하더라고요.

당시 제가 막 나온 최신형 디지털카메라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노부부의 카메라와 제 카메라를 맞바꿨습니다.
충전기에다 메모리 카드까지 다 주고,
그 집에 있는 노트북에 프로그램 다 깔아주고 왔습니다.

카메라마다 이런 사연이 있습니다.
그래서 누워서 보며 그들과 대화를 합니다.
제가 눕터뷰 요청에 흔쾌히 응한 이유입니다.”

결국 하나하나가 이야기를 품은 카메라라는 얘기였다.
그 이야기를 좀 더 묻고 싶었다.

“베트남 전쟁, 우리나라 구한말 필름이 카메라에서 나온 적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맞습니다. 베트남에서 구해 온 카메라 속에서 흑백필름이 나왔고요.

 미국에서 선교사의 조카가 소장한 카메라에서 석판 필름이 나왔습니다.
이렇듯 하나하나 보면 사연이 다 있습니다.
이렇게 구한 카메라를 옆에다 두고,
쳐다보고 있으면 얼마나 행복한 줄 아십니까?”

공간갤러리 그의 책상 위에 모두 석 대의 카메라가 있다. 늘 손 닿는 거리에 카메라가 있어야 마음이 편해진다고 했다.

공간갤러리 그의 책상 위에 모두 석 대의 카메라가 있다. 늘 손 닿는 거리에 카메라가 있어야 마음이 편해진다고 했다.

웃는 표정에 행복이 배어 있었다.
그래도 회사의 대표인데 이렇게 카메라 수집과 수리에만 매달리는 게 이상했다.

“회사도 운영하면서 시간이 되십니까?
“저는 회삿일 다합니다.

게다가 시간이 없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봅니다.
아예 술을 안 마십니다.
술 마시지 않으면 업무 끝나고도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해외 출장을 다녀도 관광 다닌 적이 없습니다.
유명관광지는 아예 가지 않습니다.
시간 나면 뒷골목을 다닐 뿐입니다.
그렇게 숱하게 프랑스 출장을 다녔어도 여태 에펠탑 한 번 안 가봤습니다.”

오지를 다닐지언정 유명 관광지는 안 가봤다는 문 대표, 사진과 카메라는 당신 삶의 동반자요 반려자라고 했다.

오지를 다닐지언정 유명 관광지는 안 가봤다는 문 대표, 사진과 카메라는 당신 삶의 동반자요 반려자라고 했다.

참 독하다 싶었다.
이렇듯 독하게 모은 카메라들이 앞으로 어떻게 쓰일지 궁금했다.

“앞으로 이 카메라들을 어찌할 생각이십니까?”
“요즘 더러 그걸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디 제대로 쓰일 곳에 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듭니다.
박물관 같은 곳인데,
하나하나의 히스토리를 잘 정리해서 보여 줄 그런 곳이 있다면 보내 줄 수 있어요.
그런데 저처럼 저렇게 진열해 둘 거면 아니고요.
지방자치 단체에서 간혹 카메라 박물관 하겠다고 연락이 오는데 별로 신뢰가 가지 않아요.
사실 아무리 오지라도 눈요깃거리와 이야기가 있으면 사람들이 가거든요.”

예상 못 한 답이었다.
저리 지독하게 모으고,
수리하고,
생명을 불어넣어서 남 준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문 대표는 카메라를 '삶의 완벽한 동반자요, 반려자'라고 했다. 그러한 동반자인 카메라가 제대로 된 곳에서 제대로 쓰이길 바란다고 했다.

문 대표는 카메라를 '삶의 완벽한 동반자요, 반려자'라고 했다. 그러한 동반자인 카메라가 제대로 된 곳에서 제대로 쓰이길 바란다고 했다.

사진 찍을 준비를 하는 동안, 누워있던 문 대표의 혼잣말이 들렸다.
“휴! 이 기사 나가면 먹고살 만하니까 배부른 소리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네.
미쳤다는 사람도 있을 거고….
하긴 미친 건 맞지.”

그는 인터뷰 중에 그가 수집한 카메라의 의미를 이렇게 규정했다.
“제 삶의 완벽한 동반자, 반려자입니다.”

그런데 그는 50년 넘게 모은 동반자를,
제대로 된 곳에 보내서,
제대로 된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의 혼잣말처럼,
미쳤으나 제대로 미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1923 Leica O-Series, 25 가지 테스트 버전 중 하나다. 100년에서 4년 모자란다.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제품이다.

1923 Leica O-Series, 25 가지 테스트 버전 중 하나다. 100년에서 4년 모자란다.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제품이다.

진열장에 전시된 카메라 사진을 찍고 있을 때,
문 대표가 '1923 라이카'라는 이름표를 달고 진열된 카메라 사진을  찍으라고 했다.
찍고 나서 어떤 카메라인지 그에게 물었다
답은 "알아서 찾아보세요"라고 했다.

사무실로 돌아와 검색해서 찾아보며 놀랐다.

'1923 Leica O-Series' 중 하나이었다.
만약 사실이라면,
당시 라이카에서 만든 25가지 테스트 버전 중 하나인 셈이다.

이 시리즈 중 1대가 2012년  스위스 비엔나에서 열린 경매에서 216만 유로에 낙찰된  바가 있었다.
당시 1923 Leica O-Series가  세계에서 가장 비싼 카메라로 등극하게 된 계기가 된 경매이었다.

216만 유로, 한화로 계산해보니 약 27억8000만원이었다.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그에게 확인차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찾아보니 1923 Leica O-Series 중 하나인데요. 맞습니까? 그렇다면 세계에서 가장 비싼 카메라 중 하나인데요."

문 대표로부터  답이왔다.
"일단 평범한 사람들이 위화감을 느낄까 하여 걱정입니다.
어차피 필요한 곳에 무상으로 기증할 것이라서,
재산상 값어치는 저한테 아무 의미 없습니다."

그랬다,
그는 자기 삶과도 같은 카메라가,
진정한 의미가 되어 세상에 존재하기를 바라는  미친(?) 수집가였다.

글·사진·동영상=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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