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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 미소로 주목받은 보테로, 미소 없는 그림을 그리다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송민의 탈출, 미술 왕초보(18)

페르난도 보테로(Fernando Botero, 1932년 4월 19일~). [사진 위키피디아(저자 Roel)]

페르난도 보테로(Fernando Botero, 1932년 4월 19일~). [사진 위키피디아(저자 Roel)]

페르난도 보테로(1932~ )는 전 세계에 남미 콜롬비아를 알린 화가이자 조각가다. 그는 “나는 뚱뚱한 사람을 그리지 않는다. 몸을 확장했을 뿐이다”라고 말한다. 그의 작품 ‘소풍’을 보자. 풍만한 두 사람이 풀밭 위에 누워 있다. 그들의 표정이 밝지는 않다. 스페인 영향으로 남미는 시에스타(낮잠) 문화가 있다. 잠이 스르르 오는 건지도 모른다. 봄을 만끽하러 떠나고 싶게 만든다.

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패러디한 ‘12살의 모나리자’(1959)로 전 세계를 미소 짓게 했다. 하지만 50년이 넘도록 보테로의 그림에 미소가 없다는 건 역설이다. 웃음은 더더구나 찾아보기 힘들다. 그 이유가 뭘까.

12살의 모나리자(Mona Lisa at the Age of Twelve Years, 1959), Fernando Botero. [사진 WIKIART]

12살의 모나리자(Mona Lisa at the Age of Twelve Years, 1959), Fernando Botero. [사진 WIKIART]

보테로는 16세에 가혹한 일을 겪는다. 2013년 뉴욕의 ‘아트뉴스’에 따르면 16세에 그는 메데인에 있는 가톨릭 학교에 다니며, 지역신문사에서 삽화와 기사를 썼다. 보테로는 입체파의 형태파괴는 현대사회의 개인주의를 파괴한다는 일종의 마르크스 개념을 어디선가 읽고 기사로 썼다.

학장은 “썩은 ‘사과’를 학교에 둘 수 없다. 다른 학생들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이다”고 말하며 많은 사람이 보는 가운데 그를 학교에서 쫓아냈다. ‘아트뉴스’는 미국의 공산주의자 색출 열풍인 매카시즘이 남미에도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이 영향인지 ‘성모’(1992)의 아기 예수는 콜롬비아 국기를 들고 있고, 성모는 사과를 들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 보테로의 고통이 투영되어 조국에 대한 애정과 간절함이 느껴진다.

보테로의 어머니는 그가 4살에 미망인이 되었고 어렵게 그를 키웠다. 그림으로는 먹고 살 수 없다고 걱정했지만, 19세에 보테로 도서관이 주최한 미술상 상금으로 유럽으로 떠난다. 루브르, 우피치. 프라도 미술관을 다니며 거장들을 통해 르네상스 고전 미술에 감탄한다.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모두가 잘 알고 있는 것을 묘사하는 것은 필수적이다”라며 자신이 살아온 삶을 그리기로 결심한다.

집으로 들어가는 빨간옷의 여인(mujer entrando a su casa), Fernando Botero. [중앙포토]

집으로 들어가는 빨간옷의 여인(mujer entrando a su casa), Fernando Botero. [중앙포토]

그 결과 고전 미술을 고집하여 비난과 냉대를 받았지만, 1955년 자신만의 화풍을 찾아냈다. 1961년 뉴욕 현대미술관은 유행하던 추상표현주의가 아니라고 비난을 받으면서도, 그의 ‘12살의 모나리자’ 작품을 샀다. 이를 계기로 2019년 현재 전 세계 박물관 50곳이 넘게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그는 가장 부유한 작가 중 한 명이 되었다.

1970~80년대 콜롬비아는 독재 치하였다. 그는 평화에 대한 주장으로 범죄조직의 납치와 협박에 시달려 해외에서 살게 된다. 그는 이때부터 오히려 한층 더 밝은 색감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나는 해외에서 살지만 나의 뿌리는 남미다. 콜롬비아 20년이 내 감성의 근원이다”고 늘 사람들에게 말해왔다.

‘콜롬비아의 춤’(1980)에는 라틴음악에 살사나 쿰비아를 추고 있다. 기타, 더블베이스 등의 악기는 소리를 내는 줄이 없고, 울림구멍도 작다. 독재 치하에서 편히 말도 못하고, 움츠러든 사람들과 어딘가 모르게 닮아있다. 이들은 어려운 현실을 춤과 노래로 시름을 달래보지만 마냥 즐거울 수는 없다. 감시당하는 독재 치하의 현실을 상징하듯, 그림마다 바닥은 담배와 병 또는 16세에 학교에 쫓겨나며 들은 ‘사과’가 어지럽게 바닥에 뒹군다.

콜롬비아의 춤(Dance in Colombia, 1980), Fernando Botero. [사진 위키아트]

콜롬비아의 춤(Dance in Colombia, 1980), Fernando Botero. [사진 위키아트]

1980~90년대는 마약 거래로 내전과 분쟁이 심각했다. 전 국민은 마약과 관련된 돈에 연결되었고, 2007년은 보테로의 아들도 마약 중개 개입으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런 이유에선지 ‘거리’(2000)에는 콜롬비아를 구성하는 흑인, 백인, 인디오, 혼혈인의 표정은 편하지 않고 서로를 경계하는 눈빛으로 보인다.

거리(La Calle, The Street, 2000), Fernando Botero. [중앙포토]

거리(La Calle, The Street, 2000), Fernando Botero. [중앙포토]

지금껏 본 여러 그림의 사람들은 비슷비슷하게 보인다. 개성 없이 과장된 몸집과 무표정한 사람들로 가득하다. “나는 재미를 위해 뚱뚱한 사람을 그린 적이 없다. 우리 사회의 리얼리티를 과장된 몸의 변형을 통해 보여주고 싶을 뿐”이라고 강조한다.

이렇게 살펴본 작품들의 내용은 조금은 무겁다. 그런데도 그림에 편안하게 시선이 간다. 그 이유는 그가 의도한 대로 풍만하고 화사한 색감 때문이다. 그는 “예술 작품은 슬픔보다 기쁨의 감정을, 예술은 오아시스나 피난처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독특한 형태와 색감은 딱딱하고 차가운 현실의 무게를 부드럽고 따뜻하게 전달하기 위함이다. 보테로의 부드러운 시각언어는 미소를 잃은 인물이 전하는 이야기를 바라보게 하는 힘이 있다.

송민 미술연구소 BRUNCH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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