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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여성을 시대의 주인공으로 그린 화가, 베르메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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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송민의 탈출, 미술 왕초보(15)

“여인이 우유를 따르는 모습이야!” “누가 이토록 흔한 일상을 잘 그렸는가, 1658년에!”
1848년 테오필 토레 뷔르거의 감탄이 상상이 된다. 그는 프랑스 비평가로 200년 동안 묻혀있던 요하네스 베르메르(1632~1675)를 미술사의 신데렐라로 만들었다.

요하네스 베르메르, 우유 따르는 하녀, 45.7x 41cm, 캔버스에 유채, 1658, 국립미술관 암스테르담. [사진 송민]

요하네스 베르메르, 우유 따르는 하녀, 45.7x 41cm, 캔버스에 유채, 1658, 국립미술관 암스테르담. [사진 송민]

베르메르는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근대예술가가 되기까지 험난한 길을 걸었다. 마치 1881년에 헤이그 경매장에 먼지를 뒤집은 채 나온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처럼 말이다. 베르메르는 왜 200년간 보잘것없는 대접을 받다가 거장으로 불리게 된 걸까. 그가 살았던 17세기의 네덜란드에 그 비밀이 있다. 반전의 이유를 찾아가 보자.

네덜란드는 17세기에 세계의 무역 중심지로 황금기를 맞이한다. 그 이유는 종교 박해를 피해 네덜란드에 온 프랑스 개신교도인 위그노는 당시에 상공업에 탁월했다. 전 세계에서 온 외국인들은 한결같이 “집집이 그림이 있어. 자신의 얼굴을 그린 초상화나 풍경화를 빵집, 정육점, 대장장이 할 것 없이 모두가!”라며 감탄했다. 개신교가 다수가 된 네덜란드는 종교화를 우상이라며 주문하지 않고, 돈이 넘쳐난 상공인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을 주문했다.

렘브란트 반 라인, 포목상 조합의 이사들, 1662. [사진 송민]

렘브란트 반 라인, 포목상 조합의 이사들, 1662. [사진 송민]

오랜 시간 네덜란드인들은 17세기 황금기를 ‘렘브란트 시기’로 불렀다. 렘브란트 반 라인(1606~1669)은 ‘포목상 조합의 이사들(1662)’처럼 유명한 남자 상인들이나 의사 단체 초상화로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베르메르를 비롯한 동시대 화가들은 네덜란드 가정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상을 그렸다. 오늘날 우리가 카메라로 일상을 찍듯이 말이다.

화가들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네덜란드의 지도를 걸고 악기 연주하며 축하하는 동네 사람들을 그렸다. 악기를 연주하며 연애하거나, 집안에서 여인들이 편지 쓰거나 읽는 유행을 그려 넣었다. 이렇듯 동시대의 화가들이 비슷한 소재로 황금기에 5만점을 그렸으니, 베르메르의 뛰어난 안목은 쉽게 부각되지 않는 그저 유행하는 일상의 모습으로 묻혀버린다.

도시에 사는 시민이 75%인 근대사회로 변하고 있다고 그 누가 말할 수 있었을까. 하층 여성을 포함한 시민사회의 개인 의식과 삶이 존중되는 특징이, 봉건시대와 근대를 가르는 기준이라고 그 누가 중요하게 여겼을까.

요하네스 베르메르, 버지널 앞에 서 있는 여인, 51.7x 45.2cm 캔버스에 유채, 1670, 런던 내셔널 갤러리. [사진 송민]

요하네스 베르메르, 버지널 앞에 서 있는 여인, 51.7x 45.2cm 캔버스에 유채, 1670, 런던 내셔널 갤러리. [사진 송민]

17세기에 근대 사상가인 데카르트는 사상의 자유를 위해 네덜란드로 왔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개인의 의식을 중요시했고, 몽테뉴는 가장 아름다운 삶은 보통의 삶이라고 수상록에서 말해 데카르트에게 영향을 미쳤다.

렘브란트는 데카르트의 말처럼 생각하는 개인의 정신을 잘 그려 사람들에게 인정받았다. 이는 베르메르에게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더해 미술상이었던 아버지 덕에 다양한 거장의 그림을 습득한 결과 배르메르는 뛰어난 구도와 명암과 색채 표현을 해낸다. 이를 기본으로 한 그의 독창성은 한 마디로 네덜란드 시민사회의 변화하는 특징을 잘 담아낸 것이다.

이를 세 가지로 정리해보자.
첫째, 네덜란드인들은 날씨가 안 좋은 탓에 햇빛이 들어오는 창문에 대한 생각이 남다른 나라다. 창문 앞을 공들여 장식하고 보여주는 것에 익숙하다. ‘우유를 따르는 여인’에서 보듯 1661년 베르메르가 살았던 델프트 도시의 창문이 생생하게 눈앞에 펼쳐진다. 그의 그림 총 36점 중 12점이 창문을 보여준다.

요하네스 베르메르,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44.5x 39.5cm, 캔버스에 유채, 1665,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사진 송민]

요하네스 베르메르,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44.5x 39.5cm, 캔버스에 유채, 1665,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사진 송민]

둘째, 등장하는 인물의 가식이 아닌 일상의 자연스러운 순간을 담는다. 이 모습들은 종교화의 성스러운 표정과 왕족의 권위를 보여주는 근엄한 표정과는 대조된다. 동시대 화가들이 진귀한 음식으로 넘쳐나는 부엌 속에 하녀를 부자연스럽게 웃는 얼굴로 그려 넣는 것과 달리, 베르메르의 ‘우유를 따르는 여인’은 피곤한 듯 자연스러운 표정과 화가를 의식하지 않고 담담히 일하는 순간을 담았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또한 순수하고 신비한 미소가 자연스럽다. 자연의 빛을 담은 눈빛과 입술과 귀걸이의 생생함은 북유럽의 모나리자로 찬사를 받는다. 여성들이 편지를 쓰고 읽는 모습, 악기를 연주하는 수줍은 미소, 레이스를 짜는 모습 모두 자연스러운 표정을 보여준다.

요하네스 베르메르, 레이스 뜨는 여인, 1669~70, 캔버스에 유채, 23.9x20.5cm, 파리 루브르박물관. [사진 WIKIMEDIA COMMONS]

요하네스 베르메르, 레이스 뜨는 여인, 1669~70, 캔버스에 유채, 23.9x20.5cm, 파리 루브르박물관. [사진 WIKIMEDIA COMMONS]

셋째, 그림 배경에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태피스트리가 탁자를 덮고 있거나 델프트 도자기의 푸른 타일과 격자무늬를 볼 수 있다. 또는 집집이 그림을 벽에 건 유행을 담았다. 17세기 악기인 버지널 건반악기와 기타, 베이스 비올라를 연주한다. 이 밖에 무역으로 진귀한 물건들이 곳곳에 있어 황금기를 잘 표현하고 있다.

넷째, 베르메르는 성화의 성모마리아와 왕족에게만 쓸 수 있었던 금지된 색인 푸른색을 쓴다. 금보다 비싼 푸른 보석을 갈아 넣은 울트라마린을 자유롭게 중하층 시민의 옷에 그려 넣는 파격적인 시도를 한다. 시민사회 변화를 마치 감지하고 보여주듯, 창문으로 들어온 빛은 푸른색을 입은 시민을 고요한 가운데 빛내준다. 여기에 더해 노란색이 생동감과 생생함을 살려 17세기 네덜란드 집안을 들여다보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결론으로 네덜란드 회화는 도시화가 가장 빨랐던 나라에서 시민들이 그림을 주문하고 그림의 주인공이 된 16세기부터 200년간 사실적 성격이 강한 근대예술이다. 이를 대표하는 베르메르는 근대 예술가의 거장이 되었다.

송민 미술연구소 BRUNCH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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