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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에덴의 동쪽' 카잔 감독 별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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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1999년 아카데미 시상식장. 90세의 엘리아 카잔(사진)이 마틴 스코세지 감독과 배우 로버트 드 니로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 나왔다. 특별 공로상을 수상하기 위해서였다.

관례대로라면 객석에서 기립 박수가 터져나와야 했지만 절반 정도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립자 중에는 워렌 비티.메릴 스트립.커트 러셀 등이 보였다. 그러나 닉 놀테.에드 해리스.홀리 헌터 등은 냉담한 태도로 팔짱을 낀 채 앉아 있었다. 스티븐 스필버그.짐 캐리는 앉아서 박수만 치며 '절충적인' 자세를 취했다.

1950년대 미국을 휩쓸었던 매카시 선풍, 즉 '빨갱이 사냥'은 할리우드도 예외가 아니었다. 52년 의회의 반민주활동위원회에 소환된 카잔은 자신이 34년부터 3년간 공산당원이었다고 고백하면서 영화계 인사들 중 자신이 알고 있던 당원들의 이름을 댔다. '빨갱이'의 이름만 대면 과거 행적을 문제삼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찰리 채플린.줄스 다신 등 유명 감독들이 양심을 지키기 위해 의회의 증언을 피해 유럽으로 떠나는 와중에 카잔의 행위는 많은 영화인들의 비난을 살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 때문에 그는 브로드웨이 시절 그룹시어터에서 함께 활동했던 절친한 동료 연출가인 아서 밀러와도 갈라서게 된다. 이날 아카데미 시상식장에서 카잔은 할리우드의 용기와 관용에 감사를 표했지만 일부의 '침묵 시위'는 40여년이 지났어도 할리우드가 카잔의 '배신'을 용서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가 영욕으로 얼룩진 영화 인생을 뒤로 하고 지난 28일 뉴욕 맨해튼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알려지지 않았다. 94세.

평생 '변절자''밀고자'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었지만 그의 영화에 대해서는 누구도 군말을 하지 못했다. '영원한 반항아' 제임스 딘을 탄생시킨 '에덴의 동쪽'(55년)을 비롯해 , 그레고리 펙의 '신사협정'(47년), 말론 브랜도를 발굴한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51년), 내털리 우드와 워렌 비티의 '초원의 빛(61년) 등 수작을 내놓았다.

특히 말론 브랜드가 주연한 '워터프런트'(54년)는 카잔의 최고 작품이지만 그의 '변절'행위와 관련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워터프런트'는 뉴욕의 부두를 배경으로 부패와 폭력이 만연한 노조 지도부를 주인공이 고발한다는 내용. 영화 마지막에 주인공이 "난 내가 한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절규하는 장면은 카잔이 자신의 밀고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실제로 1996년 베를린영화제로부터 평생공로상 수상자로 초청받은 그는 "그때의 행위를 실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이전에 공산당원이었다. 그러나 거기서 일어나는 일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몇몇 부분에는 동의했지만 방법이 내게 맞지 않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양친이 그리스인이었던 카잔은 1909년 터키 이스탄불에서 태어났으나 4세 되던 해 가족이 미국으로 이주했다. 예일대에서 연극을 공부하고 브로드웨이로 진출해 인정받은 그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모두가 나의 아들들'등의 연극을 연출했다.

이후 할리우드의 손짓을 받고 41년 '잇츠 업 투 유(It's Up to You)'로 데뷔해 주로 연극 작품을 영화화하거나 사회 문제를 소재로 다루었다.

그는 특히 인물의 심리를 강조하는 메소드 연기법으로 유명한 엑터즈 스튜디오를 설립해 걸출한 배우들을 배출하기도 했다. 말론 브랜도는 물론 워렌 비티, 로버트 드 니로 등이 그의 문하생이었다.

그의 제자 중 21명이 아카데미 연기상 후보에 올랐고 이 중 9명이 주연상을 수상했다. 76년 '마지막 거물'을 끝으로 사실상 매거폰을 놓았던 그는 이제 역사적 평가와 주옥 같은 작품을 후대에 남겨두고 '마지막 거장'으로 우리 곁을 떠났다.

이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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