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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법원, “아내와 성관계는 남자의 ‘근본적 인권’”…논란

중앙일보

입력

영국 런던 시내에 위치한 가정법원 간판. [PA 통신]

영국 런던 시내에 위치한 가정법원 간판. [PA 통신]

 영국 가정법원 판사가 법정에서 “아내와 성관계할 권리는 (남편의) 근본적 인권에 해당한다”고 말해 논란이 일고 있다. 정신 질환을 앓는 아내와 동의 없이 성관계를 맺어서는 안 된다는 변호인 측 주장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면서다.

정신장애 앓는 아내 측 요청에 #"20년 간 섹스 금지는 인권 침해" #추가 심리 진행한 뒤 결론 내기로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3일(이하 현지시간) 런던 가정법원 내 보호법원(Court of Protection)이 판단 중인 사건에 대해 보도했다. 지난 1일 이 법정에서는 정신 장애가 있는 아내 A와 그녀의 남편이 참석한 재판이 열렸다. 부부의 성관계를 법적으로 금지할 것인지가 이날의 핵심 쟁점이었다.

 아내 측 변호를 맡은 변호사는 A의 진료 기록 등을 근거로 그녀가 더는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능력이 없음이 명백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판사에게 “남편에게 20년간의 ‘섹스 금지’ 명령을 내려달라”고 요청했다. “앞으로 아내 의사에 반해 부부 사이 강간이 발생할 가능성을 원천 차단해야 한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하지만 법원은 변호사의 주장을 즉시 받아들이지 않았다. 해당 사건을 심리한 고등법원판사(High Court Judge) 앤서니 헤이든은 아내 측 요청에 대해 “아내와 섹스하는 권리보다 더 명백한 ‘근본적인 인간의 권리(fundamental human right)’는 생각해내기 어렵다”고 답했다. 나아가 “(부부간의 섹스를) 장려(monitor)하는 것은 국가의 권리”라는 의견도 제시했다. “그런 상황에서는 남편이 감옥에 수감된 것과 같은 처지에 놓일 수 있다”는 발언과 함께다.

 가디언은 헤이든 판사의 말이 법정에 울려 퍼진 순간 앉아있던 방청객들이 크게 들썩였다고 전했다. 해당 발언이 언론을 통해 전해지자 영국인들 사이에서는 크게 두 가지 논란이 일었다. ▶장애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 보장 문제와 ▶정부가 국민 사생활에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다.

 영국 노동당 소속 여성 국회의원 쌩엄 데비네어는 해당 소식이 전해진 직후 트위터에 “헤이든 판사의 논리는 ‘여성 혐오증(misogyny)’에 해당한다”며 “영국에 있는 그 어떤 남자도 그와 같은 방식으로 섹스를 주장할 법적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비난했다. 이 트윗은 이틀간 700회 이상 리트윗됐다. 줄리라는 이름의 한 여성은 “기혼 여성의 성관계 동의권은 영국 귀족원(상원)이 이미 1991년 판례를 통해 보장했다”는 의견을 남겼다. 데비네어 의원은 지역구 여성들의 의견을 취합해 헤이든 판사에게 A4 용지 두 장 분량의 공식 항의 서한을 전달했다.

 가디언에 따르면 영국 가정법원 내 보호법원은 “스스로 의사결정을 내릴 만한 정신적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에 대한 사건을 전담하는 곳”이다. A 부부가 사는 지역의 사회복지담당 부서에서 변호사를 고용해 아내의 변론을 담당했다. 사회보장제도가 발달한 영국에서는 장애인을 보살피는 지자체 사회복지팀이 직접 환자의 법적 권리 보호까지 도맡곤 한다. 한국에서 갓 첫발을 뗀 ‘성년후견제’의 발전된 형태인 셈이다.

 헤이든 판사는 “남편 측에 의견 제시 기회를 충분히 준 뒤, 세부 증거에 대한 추가 심리를 거쳐 최종 판단을 내릴 것”이라고 밝혔다. 아내 A는 학습 장애를 겪고 있고, 증세가 막 악화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법원은 재판 당사자들의 사생활 보호를 위해 부부의 나이 및 아내의 정확한 병명 등을 외부로 알리지 말라고 명령했다. 판결은 다음 달쯤 나올 전망이다.

심새롬 기자 saero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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