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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붕괴]20만 찾던 '철가방극장' 청도, 전유성 떠나자 폐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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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이 위기다. 저출산ㆍ고령화ㆍ저성장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 나라 전체 인구는 아직 증가세지만 지방에선 자연 사망이 출생을 압도한다. 여기에 젊은이가 돈과 꿈을 찾아 도시로 빠져나가고 있다. 인접 4개 시군을 묶어도 서울 한 개 구 인구의 절반도 안 될 정도로 지방은 텅 비었다. 이대로 가면 지방 소멸은 불 보듯 뻔하다. 2040년에 지자체의 30%가 제 기능을 상실할 것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공동체 유지가 어려운 한계 마을은 점(點)에서 선(線)으로, 면(面)으로 퍼지고 있다. 반면 국토 면적의 12%인 수도권은 거의 모든 게 조밀하다. 사람, 돈, 의료, 문화시설이 쏠려 있다. 지방 쇠퇴, 수도권 중심의 극점(極點) 사회는 눈앞의 현실이다.        
하지만 정부의 위기의식은 엷다. 정책이 지방 재생의 대계보다 토건 국가형 대형 SOC 투자, 도시 재생에 무게가 가 있다. 그나마 일부 사업엔 정치 논리도 꿈틀거린다. 지방 소멸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인가. 정부나 지자체 정책에 문제점은 없는 것일까. 지방 회생의 처방전은 있는 것일까. ‘지방 붕괴…재생의 길을 찾아서’ 시리즈를 통해 지방의 현주소와 대안을 짚어본다. 

지난달 중순 경북 청도군 풍각면의 코미디철가방극장 주차장 입구에 출입 금지 테이프가 붙어 있다. 개관을 주도한 개그맨 전유성씨가 이곳을 떠나면서 주변엔 정적만 흐르고 있다. 김윤호 기자

지난달 중순 경북 청도군 풍각면의 코미디철가방극장 주차장 입구에 출입 금지 테이프가 붙어 있다. 개관을 주도한 개그맨 전유성씨가 이곳을 떠나면서 주변엔 정적만 흐르고 있다. 김윤호 기자

지난달 중순 경북 청도군 풍각면 성곡리. 읍내서 뚝 떨어진 저수지 쪽으로 들어서자 2층 높이의 우스꽝스러운 건물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중화요리 배달용 철가방 모양의 건물에 벽면을 장식한 소주병과 면이 불어 넘친 짜장면 조형물. 개그맨 전유성(70)씨가 이끌던 ‘코미디철가방극장(372㎡)’이다. 전통 소싸움 고장인 청도의 새 명소로 각광받아온 곳이다.

⑤‘양날의 칼’인 지자체 셀럽 마케팅 #"배꼽 빠진다" 입소문에 20만명 찾은 코미디극장 #개관 주도 전씨 떠나자 전기마저 끊기고 정적만 #성추문 이윤택의 김해 도요스튜디오도 흡사 폐허 #셀럽 부침과 결별에 웃고우는 지자체들 적잖아 #관 주도 벗어나 지역 고유 문화자원 개발 나서야

하지만 주변은 인적이 끊긴듯했다. 주차장엔 과자봉지와 담배꽁초가 널려 있었고, 극장을 둘러싼 작은 숲에는 잡풀이 무성했다. 극장에 걸린 ‘웃음건강센터’ 간판이 무색했다. 전씨가 지난해 청도군과 코미디 관련 행사 문제로 갈등을 빚다가 떠나면서 지금 극장엔 전기마저 끊겼다. 웃음 콘텐트에 산골 속의 뜬금없는 이색 건물이 더해져 관광객을 끌어오던 지방의 성공 드라마는 한편의 웃지 못할 코미디로 바뀌었다.

전유성씨가 철가방극장 무대에 올라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습. [중앙포토]

전유성씨가 철가방극장 무대에 올라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습. [중앙포토]

극장 주변은 원래 외지인이 거의 찾지 않던 마을이다. 2008년 저수지가 생기면서 수몰 마을 주민들이 옮겨와 정착했다. 외딴 마을은 2012년부터 딴 세상이 됐다. 사람들로 북적거리면서 활기가 넘쳐났다. 청도군과 농림수산식품부가 농촌종합개발사업의 하나로 12억원을 들여 철가방극장을 열면서다.

개관은 2007년 전원생활을 하려고 청도에 와있던 전씨가 마을 주민들과 더불어 이끌었다. ‘전유성’이라는 이름의 유명세와 개그맨 지망생들의 몸을 아끼지 않는 공연, 절로 웃음이 나오는 극장 모습…. 이곳을 찾으면 “배꼽이 빠진다”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개관 후 20여만명이 극장을 찾았다. 공연 횟수만 4400여 회나 됐다. 인구 4만여명의 청도에 새로운 홍보탑이 생겨난 셈이다.

코미디철가방극장 전경. 건물은 보는 순간 절로 웃음이 나오지만 벽에 붙은 인형 옷은 찢어져 있다. 김윤호 기자

코미디철가방극장 전경. 건물은 보는 순간 절로 웃음이 나오지만 벽에 붙은 인형 옷은 찢어져 있다. 김윤호 기자

경제적 파급 효과는 적잖았다. 극장 일대 마을(성곡리·현리리·수월리·봉기리) 주민들은 조합을 만들어 외지인들에 음식을 팔았다. 감 따기, 에코백 만들기 같은 다양한 체험 행사도 운영했다. 청도군 측은 “조합에서 식당과 체험 행사 등으로 2015년 이후 해마다 2억원 이상을 벌었다”고 전했다. 극장 문을 닫은 산골은 다시 조용해졌다. 지난해 조합 매출은 6600만원으로 줄었다. 군 관계자는 “극장의 새 활용 방안을 마을 주민들과 같이 찾고 있다”고 말했다.

철가방극장은 지역을 살리려는 또 다른 아이디어다. 유명인사(셀럽)의 명성과 유ㆍ무형 자산으로 관광객을 유치해 지역에 돈을 떨어뜨리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자연환경과 특산물 등을 활용해 경기를 부양하려는 지역 축제와 한 맥락이다. 셀럽 마케팅은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사업이기도 하다. 이렇다 할 홍보 자원이 없는 지자체에 셀럽의 높은 인지도는 절실하다. 셀럽은 지자체의 작업 공간과 재정 지원으로 지역 문화 활성화에 기여하고 자신의 브랜드를 넓힐 수 있다. 지자체의 셀럽 마케팅이 전국으로 퍼진 이유다. 그러나 셀럽 마케팅은 양날의 칼이다. 셀럽이 떠나거나 추문에 휩싸이면 대박을 내다가 쪽박을 차기 십상이다.

지난달 20일 찾은 경남 김해시 도요마을의 도요창작스튜디오. 연극계 대부 이윤택씨의 극단 숙소 등이 있던 이곳의 출입문이 부서진 채 방치돼 있다. 위성욱 기자

지난달 20일 찾은 경남 김해시 도요마을의 도요창작스튜디오. 연극계 대부 이윤택씨의 극단 숙소 등이 있던 이곳의 출입문이 부서진 채 방치돼 있다. 위성욱 기자

전국에 제2의 철가방극장 신세는 적잖다. 지난달 20일 오전 경남 김해시 생림면 도요마을(5113㎡) 도요창작스튜디오. 지난해 1월까지 연출가 이윤택(67)씨가 이끄는 극단 연희단거리패의 숙소와 연습 공간이 있던 곳이다. 그러나 2월 중순 이씨가 성 추문 사건에 휩싸여 이곳을 떠나면서 지금은 폐허처럼 방치돼 있었다. 스튜디오 출입문은 한쪽이 부서져 있었고, 행사ㆍ공연 시설, 단원 숙소 주변은 잡초가 지키고 있었다. 인근 마을회관에서 만난 70대 주민(여)은 “극단 시설이 텅 비면서 더는 찾아오는 사람도 없어졌다”고 말했다.

이작초등학교 도요분교(폐교)에 자리한 이 스튜디오는 원래 김해 지역 예술인들의 창작 공간이었다. 20년 전 김해예술창작스튜디오란 이름으로 출발했다. 하지만 도심과 많이 떨어져 활성화되지 못했다. 김해시는 2009년 인근 밀양연극촌에 있던 연극계 대부 이씨에 주목했다. 이씨로선 밀양연극촌이 유명해져 찾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극단만의 독립된 공간이 필요한 터였다.

이씨가 김해시의 스튜디오 운영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도요마을은 거듭났다. 감자 마을에서 지역의 문화 거점이 됐다. 이씨가 배우 훈련만이 아니라 공연도 하고 출판사와 도서관도 만들면서다. 연희단거리패는 해마다 강변 축제도 열었다. 정해윤(69) 도요마을 이장은 “마을의 60여 가구 70여명이 연극 무료 관람 외에 각종 축제나 행사로 즐길 거리가 많았다”며 “축제나 행사 때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도요감자를 팔아 부수입도 올렸는데 이제 그런 혜택도 사라졌다”고 했다.

 도요창작스튜디오 모습. 위성욱 기자.

도요창작스튜디오 모습. 위성욱 기자.

김해시는 이씨의 성 추문 사건이 불거지자 극단과의 위탁계약을 해지했다. 시는 그동안 극단 측에 다양한 형태의 지원을 해왔다. 상하수도료 등 공공요금 지원에서 강변 축제 보조금까지. 하지만 도요창작스튜디오가 사실상 문을 닫으면서 현재 터 소유주인 경남교육청과 향후 활용 방안을 모색 중이다. 셀럽의 부침에 도요마을은 웃고 울었다. 덩달아 폐교 활용의 성공 모델 얘기도 쑥 들어갔다.

밀양시도 이씨와 연을 끊었다. 성 추문 사건 후 극단과 밀양연극촌 무료 임대계약을 해지했다. 2000년 시작한 밀양여름공연축제도 없앴다. 사시사철 북적대던 연극촌은 한동안 사람들의 발길이 끊겼다. 주변 식당이나 슈퍼ㆍ커피숍의 매출이 급감했다.

밀양연극촌에서 K-STAR 단원들이 연습을 하고 있다. 위성욱 기자

밀양연극촌에서 K-STAR 단원들이 연습을 하고 있다. 위성욱 기자

하지만 밀양연극촌은 지금 예전의 활기를 조금씩 되찾고 있다. 시 측이 연극촌 활성화를 위해 밀양문화재단을 통해 ‘청년 K-STAR 밀양연극아카데미’를 발족하면서다. 지난해부터 선발한 청년예술인 30여명은 다양한 예술 교육과 훈련을 거쳐 무대에 서게 된다. 이들을 중심으로 올해 제2회 밀양푸른연극제가 막을 올린다. 셀럽의 명성에 기대지 않는 새로운 도전이다. 아카데미 관계자는 “밀양연극촌이 무너진 위상을 회복하고 명성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도록 조직을 운영할 계획”이라고 했다.

셀럽 몰락으로 타격을 받은 곳은 김해나 밀양만이 아니다. 성추행 의혹을 받는 시인 고은(86)씨에 거처(문화향수의 집)를 제공한 데 이어 문학관을 세우려던 수원시도 곤욕을 치렀다. 문화계의 미투(Me Too) 바람은 지방에도 뼈저린 교훈을 남겼다. 살아있는 셀럽 활용 마케팅이 부메랑으로 돌아오는 현장을 목도하면서다. 조지선 연세대 인간행동 연구소 전문연구원(심리학)은 “셀럽 마케팅은 지역 이미지를 높일 수도 있지만, 셀럽이 불미스러운 사건과 연루되면 대중으로부터 외면받는 위험성도 공존한다”며 “지자체는 셀럽 선정 때부터 세밀한 검증 과정을 거치고, 과욕으로 셀럽과 갈등을 빚지 않도록 ‘보이지 않는 조력자’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연중 관광객 발걸음이 끊이질 않는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의 이효석 문학관. 봉평은 이효석이 난 곳으로 한국 단편소설의 백미 '메밀꽃 필 무렵'의 배경이다. [중앙포토]

연중 관광객 발걸음이 끊이질 않는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의 이효석 문학관. 봉평은 이효석이 난 곳으로 한국 단편소설의 백미 '메밀꽃 필 무렵'의 배경이다. [중앙포토]

현재의 셀럽과 달리 타계한 저명 문화예술인은 지역의 항구적 자산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들의 생가나 작품 배경, 생활 터전 모두가 마케팅 대상이다. 실제 이들이 지자체의 홍보 아이콘으로 자리 잡은 곳은 수두룩하다. 강원 평창의 이효석 문학관, 경기 양평의 황순원 문학촌, 제주의 이중섭 거리, 대구의 김광석 거리 등등. 수수하지만 꾸준히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명소들이다. 지자체가 역사나 작품과의 가교 역을 맡는 현장이기도 하다.

장기적으론 관(官) 주도를 벗어나 문화관광재단을 만들어 지역 고유의 문화 자원을 발굴해야 한다는 얘기도 많다. 이원태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지자체가 셀럽 등을 활용한 행사를 하면 외부 기획사에 의존할 가능성 있다"며 "문화관광재단을 만들면 한 지자체에 30명 정도의 일자리도 생기고, 지속 가능한 주민 참가형 문화사업을 펼 수 있다"고 말했다.

청도·김해·밀양=위성욱·김윤호 기자

youknow@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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