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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포기하고 수도자의 길로…내 안의 SKY캐슬 버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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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서명원 신부는 ’한국에 와서 불교와 유교, 도교를 만났다. 저는 그리스도교인이다. 가톨릭이란 우물 밖으로 나가 세계종교라는 큰 바다에서 익사하지 않고 헤엄치는 법을 배웠다. 이제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니라 바다를 바라보는 개구리가 됐다“고 말했다. [변선구 기자]

서명원 신부는 ’한국에 와서 불교와 유교, 도교를 만났다. 저는 그리스도교인이다. 가톨릭이란 우물 밖으로 나가 세계종교라는 큰 바다에서 익사하지 않고 헤엄치는 법을 배웠다. 이제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니라 바다를 바라보는 개구리가 됐다“고 말했다. [변선구 기자]

서울 강남에서 차로 1시간 거리였다.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 산골에서 서명원(66) 신부를 만났다. 그는 프랑스계 캐나다 출신이다. 불어 이름은 베르나르 스네칼. 14년간 서강대 종교학과 교수로 일하다 지난달 정년퇴직했다. 그리고 2015년 이곳에 세운 도전돌밭공동체로 내려왔다. 3300㎡(약 1000평) 땅에 유기농 농사를 짓고, 컨테이너 건물로 세운 명상센터에서 영성을 일군다. 도반(道伴) 여섯 명과 함께 수행과 학술 연구와 농사를 병행하고 있다. 젊었을 적, 그는 수도자의 길을 택하고자 의사의 길을 버렸다. 그 이유를 물었다.

캐나다 신부 서명원의 인생반전 #병원 해부실서 만난 죽음에 충격 #‘3대째 의사 집안’ 압박서 벗어나 #프랑스 수도원서 찾은 ‘나의 자리’ #부모 희망 좇았다면 불행했을 것 #서강대서 14년간 종교학 가르쳐 #퇴직 후 여주서 농사·명상 병행

의대를 5년간 다니다가 그만두고 수도원에 들어가 예수회원이 됐다. 왜 의대를 갔나.
“돌아가신 어머니가 간절히 원하셨다. 어머니는 극성스러운 ‘헬리콥터 맘’이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지 올해로 8년째다. 나는 이제야 비로소 어머니를 편안하게 보내드릴 수 있다.”

서 신부의 외할아버지는 의사였다. 어머니는 의사의 딸이었고, 소아과 의사인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그리고 자식들도 의사가 되기를 바랬다. ‘3대째 의사 집안’을 꾸리길 원했다.

최근 한국에서 ‘스카이 캐슬’이란 TV 드라마가 큰 화제였다. 거기서도 ‘3대째 의사 집안’을 만들려는 ‘헬리콥터 맘’ 이야기가 나온다.
“엄마는 아버지와 다르다. 엄마는 자신의 몸 안에서 생명체를 만들고, 10개월간 품고 지낸다. 그건 굉장히 원초적이고 동물적인 경험이다. 자식에 대한 엄마의 애착은 강하다. 그런데 거기에는 사랑뿐만 아니라 집착이 함께 있다.”
어머니는 왜 그리 의대를 고집하셨나.
“그래야 돈을 많이 벌 수 있으니까. 그래야 사회에서 인정받는 직업을 가지니까. 그래야 좋은 배우자를 만날 수 있으니까. 출세하려면 장래가 밝은 전공 분야를 가져야 하니까. 어머니는 그렇게 말했고, 그렇게 믿었다.”
마치 한국 사람 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
“유교 문화권에만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자녀가 안정되게 살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은 전세계적인 거다.”
프랑스 보르도 의과대학 재학시절 럭비팀에서 활약했던 서명원 신부가 앞줄 맨 오른쪽에 앉아 있다. [사진 서명원 신부]

프랑스 보르도 의과대학 재학시절 럭비팀에서 활약했던 서명원 신부가 앞줄 맨 오른쪽에 앉아 있다. [사진 서명원 신부]

서 신부는 5남매 중 셋째다. 딸 하나, 아들 넷인 집안이었다. 어머니는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딸은 변호사, 아들은 의사”라고 계획을 모두 세워놓았다. “어머니는 의사 외에 다른 직업도 좋을 수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으셨다. 자식들의 인생에 다른 길도 있을 수 있음을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서 신부는 캐나다 퀘벡주 몬트리올에서 고등학교와 칼리지를 다녔다. 그리고 600년 전통인 프랑스 보르도대학 의대에 입학했다. 경쟁률은 50대 1이었다.

수학이나 물리학, 생물학보다 철학과 문학이 더 좋았다고.
“궁금했다. 삶의 의미가 뭔지, 존재 이유가 뭔지. 집 주위에 있던 너구리와 고라니, 그리고 들풀들도 결국 죽는 존재였다. 모든 생명체가 이렇게 죽는다면 내게 주어진 이 삶의 의미는 뭘까. 친구들과 술 마시고 놀고 떠들던 와중에도 늘 그 너머에 대한 물음이 있었다.”
프랑스 예수회 입회 직후에 만든 여권 사진. [사진 서명원 신부]

프랑스 예수회 입회 직후에 만든 여권 사진. [사진 서명원 신부]

프랑스 대학은 입학보다 졸업이 훨씬 더 어렵다. 의대는 예과 1학년 시험을 마치면 학생들의 상당수가 떨어져 나간다. 1학년 시험에서 한 차례 낙방한 그는 목숨을 걸고 공부했다. 결국 예과 1학년 시험을 통과하고 5년간 의대를 다녔다.

방학 때는 캐나다로 돌아갔다. 몬트리올 성모병원의 지하 해부실에서 아르바이트했다. 두 달 반인 여름방학 내내 시신을 해부했다. 5년간 여름방학 아르바이트에서 무려 시신 359를 해부했다.

시신 해부는 힘들지 않았나.
“첫 해부 때는 까무러치는 줄 알았다. 내장에서 나오는 냄새가 너무 지독했다. 그래도 참았다. 거기서 멈추면 더 못 들어가니까. 시신을 해부할 때는 목부터 배꼽까지 절개해서 다 연다. 오장육부를 잘라서 조직 검사를 한다. 머리도 잘라서 뇌를 꺼내 육안으로 다 봤다. 뇌출혈이 있었다면 해당 부위가 단단하지 않고 물렁물렁해지니까. 그런 걸 손으로 다 만지며 찾아냈다. 정말 힘들었지만 많이 배웠다.”
가장 크게 배운 것은.
“시신 중에는 꼬마들도 있고, 젊은 사람도 있고, 태어나자마자 죽은 아기도 있고, 자살한 사람도 있었다. 그들을 보며 ‘인간의 죽음’을 생각했다. 해부실 아르바이트는 내게 죽음을 직시하게 했다. ‘오늘 병원 휴게실에서 만난 아이도 머지않아 나처럼 나이가 들 거고, 나중에는 노인이 되고, 결국에는 죽겠지.’ 나는 그걸 배웠다. 죽은 사람과 일했으니까 가능했던 일이다.”
서명원 신부가 그리스도교 영성을 길어올리기 위해 가부좌를 튼 채 명상을 하고 있다. [사진 서명원 신부]

서명원 신부가 그리스도교 영성을 길어올리기 위해 가부좌를 튼 채 명상을 하고 있다. [사진 서명원 신부]

해부실에서 ‘내 죽음’을 미리 만난 셈이다. 당신의 삶, 무엇이 달라졌나.
“내 안에서 끊임없이 올라오는 물음을 더는 무시할 수 없었다. 1979년 4월, 의대 5년차였다. 나는 보르도에서 기차를 타고 8시간 떨어진 리옹으로 갔다.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이 지역의 수도원에서 8일간 피정을 했다. 명상할수록 내 마음의 소리가 뚜렷해졌다. 6일, 7일, 8일째 되던 날, 나는 갈수록 더 깊이 느꼈다. ‘독신 생활, 수도 생활을 해야겠다. 그것도 지금 당장.’ 그걸 확실히 느꼈다.”
부모님이 반대하지 않으셨나.
“말도 못할 정도였다. ‘거짓말쟁이’ ‘위선자’ ‘배신자’ ‘인생의 낙오자’라는 말을 들었다. 심지어 ‘그동안 투자한 돈을 다 날려버렸다’는 말까지 들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그때 돌아보니 나는 ‘내가 되고 싶은 나’가 아니라 ‘부모님이 바라는 나’가 돼 있었다. 나는 ‘내가 되고 싶은 나’를 택했다. 그래서 여름에 의대를 자퇴하고, 가을에 프랑스의 예수회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만약 그때 ‘부모님이 바라는 나’를 택했다면 어땠겠나.
“불행해졌을 거다. 제 남동생은 공부를 아주 잘했다. 모든 과목에서 1등이었다. 캐나다의 명문 의대에 합격했다. 어머니가 바라던 바였다. 그러나 동생은 합격 점수를 확인한 날 저녁에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했다. 메시지는 분명했다. ‘엄마,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의대에 합격해 드렸어요. 이제 됐죠?’ 이거였다. 그때까지 동생은 단 한 번도 ‘의대에 가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또 다른 남동생도 의사다.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마자 50세 때 의사 생활을 그만두었다. ‘이제는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겠다’고 했다. 의사로서 돈은 많이 벌었지만, 정서적으로는 불행한 인생이었다. 의사가 됐다면 나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수도원 생활은 어땠나.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제대로 심어졌다는 느낌이었다. 그걸 늘 느꼈다. 지금껏 살면서 수도자의 길이 힘들 때도 많았다. 지금도 여전히 쉽지 않다. 하지만 ‘이 길이 맞을까’하는 의심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의대에 다닐 때는 늘 그런 의심 속에서 살았다.”
각자의 삶에서 ‘내면의 소리’를 찾아가는 게 왜 중요한가.
“프랑스 작가 앙드레 지드는 이렇게 말했다. ‘삶에서 하고자 하는 바를 다 하고 세상을 떠나는 사람은 지극히 드물다. 나는 나의 일생에서 하고자 하는 바를 다 했다.’ 무슨 뜻일까. 내면의 목소리를 따라갈 때 우리는 본질적으로 살게 된다. ‘죽을 때 여한이 없으려면 지금 당장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런 물음을 던져보라. 답이 어디에 있을까. 자기 가슴에서 올라오는 ‘내면의 소리’에 그 답이 있다고 본다.” 

선교사로 한국 와 불교 공부 … 성철 스님 연구로 박사학위

서명원 신부는 가톨릭 신부이지만 불교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강단에서 불교 강의를 해왔다. 1979년 예수회에 입회한 뒤 신학생 시절인 1985년 한국에 선교사로 파견돼 다종교 문화권의 존재를 접한 그는 1988년 불교를 전공으로 택했다. 이후 성철 스님 연구로 프랑스 파리 7-드니디드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2005년 서강대 종교학과 교수로 부임해 불교 강의를 해왔다. 법명은 천달(天達).

2016년 서강대 종교연구소에서 ‘성철불교’를 다각도로 조명하는 학술대회를 열고 그 연구 성과를 모아 지난 2월 『산은 산 물은 물: 성철불교에 대한 검토』(광일문화사)를 발간했다. ‘일상생활과 수행은 하나(生修不二)’라는 주제를 탐구한 책이다.

2015년 한국 국적을 취득한 그는 2016년 서명원이라는 이름을 호적에 올렸다.

그가 2015년 설립한 도전돌밭공동체에선 종교와 관계없이 공동체에 모인 약 50명의 회원이 기도와 명상, 공부, 농사를 함께하고 있다.

여주=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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