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서울대 장학금 신청서에는…"경제적 절박함 구체적으로 써라"

중앙일보

입력

서울대학교. [중앙포토]

서울대학교. [중앙포토]

"개인 사정으로 장학금이 필요했는데 신청서에 '경제적으로 절박한 정도를 구체적으로 작성하시오'란 문구를 보고 자존심이 상했어요."

서울대 사회대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A(27)씨는 단과대 장학금인 '선한인재지원금'을 신청하려 했지만 장학금 신청서를 보고 고민 끝에 결국 다른 장학금을 신청했다.

1일 대학가에 따르면 국가인권위원회가 장학사업에서 '가난을 증명하라'는 식의 신청 양식 사용을 지양하라고 2년 전 각 대학에 권고했지만 서울대는 여전히 이런 양식 작성을 요구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서울대 개별 단과대가 운영하는 선한인재지원금 제도는 경제적으로 형편이 어려운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6개월간 월 30만원씩 지원해주고 이후 경제적으로 안정되면 장학 수혜자가 소액기부를 통해 갚는 방식의 장학제도다.

2019학년도 1학기 선한인재지원금 신청서 자기소개서에는 "선한인재지원금을 꼭 받아야 하는 이유"를 적으라며 "경제적으로 절박한 정도를 구체적으로 작성하면 선발에 참고하겠다"고 돼 있다. 지원자에게 경제적으로 절박한 정도를 세 등급으로 나눠 선택하라는 요구도 했다.

A씨는 "어차피 건강보험료 납부확인서를 제출하는데 경제적 절박함을 굳이 자기소개서에 다시 적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며 "내 가난함과 절박함을 구체적으로 전시하는 것이 '선한 인재'가 되는 요건이 된다는 사실에 씁쓸하다"고 말했다.

대학원생 B씨도 "장학금 수혜 인원은 이미 정해져 있을 텐데 결국 자기소개서에 적은 경제적 형편으로 다른 사람과 경쟁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고 지적했다.

인권위는 2년 전 관련 내용에 대해 인권침해 요소가 있다며 개선을 요구했지만 서울대에서는 별다른 변화 움직임이 없었다.

2017년 인권위는 "대학 장학금 지원서에 어려운 가정·경제 상황을 적게 하는 것은 신청 학생의 자존감을 훼손할 수 있다"며 이같은 관행을 지양하라고 대학 당국과 장학재단에 권고한 바 있다.

당시 인권위는 "신청 학생의 가정·경제적 상황은 객관적인 공적 자료를 통해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며 "장학금의 취지나 목적을 고려하여 자유롭게 작성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서울대 사회대 장학업무 담당 관계자는 "장학금 자기소개서는 지원자의 경제적 상황을 보다 구체적으로 알기 위해 활용됐다"며 "이번 학기에는 자기소개서 내용과 상관없이 신청자 전원이 합격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2017년 인권위 권고사항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며 "다음 학기부터 논란이 된 해당 문구를 삭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서울대는 이날 해명자료를 내고 "선한인재지원금은 외부재단 기금으로 운영되는 대학원생 대상 장학금으로 가계소득 1분위 이하 학부생들을 대상으로 서울대가 시행하는 '선한인재장학금'과 다르다"며 "논란이 된 선한인재지원금 신청양식은 외부재단의 요청에 따른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2년 전 인권위 권고사항은 서울대를 특정해 지적한 것이 아니라 전국 대학을 대상으로 내려졌다"며 "당시 본교에서 시행하던 장학금 신청양식에는 문제 소지가 되는 내용이 없었다"고 덧붙였다.

김지혜 기자 kim.jihye6@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