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조의 자주성과 자존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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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일본의 노조 간부들이 현대 중공업 노조를 방문, 노사 투쟁 방식에 관한 VTR테이프· 책자·화보 등과 격려금으로 일화 56만5천엔을 전달한 사실은 범상한 일이 아니다.
견해에 따라서는 동류의식에서 노조끼리 국경을 넘어 격려한 정도로 가볍게 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노사 분규로 경제의 한 모퉁이가 찌그러 들고 참담한 고통을 겪고 있으며 그 해결을 위해 고심하고 있다. 불난 집에 부채질하고 다니는 심보를 너그럽게 보아줄 수 없다. 선의의 해석과 이해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둔다. 그런 뜻에서 전 일본수도 동경 노조 등 5개 노조간부의 국내 노조 방문과 현금 전달 건은 동기와 목적, 그리고 어떤 복선이 깔려 있는 것인지 실체적 진실이 밝혀져야 한다.
우리의 복잡하고 예민한 노사 분규 현장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노사 분규를 더욱 조장할지 모를 경솔한 짓을 왜 했겠느냐는 의문이 앞서며, 따라서 우리는 일본 노조대표들의 행동을 순수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 동안 우리는 밑도 끝도 없는 각종 「설」에 『설마 그럴리야…』하고 반신반의하고 있던 차에 오비이낙으로 일본노조 간부들의 한국업체 노조방문이 이루어져 의혹이 더욱 짙어질 수밖에 없다.
노사분규가 격화되고 장기화 되는 가운데 해외로부터 노동 운동 관련자금이 유입되고 있다는 뜬구름 같은 소문이 무성했다. 심지어 일본 업계가 경쟁 관계에 있는 한국의 자동차·조선 등의 경쟁력 약화를 위해 어떤 공작을 하는 것 같다는 근거 없는 추측들이 시중에 많이 나돌 정도였다. 우리 노조가 그런 자금을 썼다고 우리는 조금도 믿지 않는다.
일본 노조 간부들이 자료와 현금을 우리 노동 현장에 직접 가지고 나타난 것은 우리 노사분규를 더욱 격화시켜 산업경쟁력을 약화시키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같은 오해의 소지는 있다.
한국과 일본은 조선·자동차·전자 산업 분야에서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으며, 특히 조선은 우리 조선업계가 노사분규로 진통을 겪는 사이 일본 조선 업계가 힘 덜 들이고 반사이익을 보고 있다고 외지들은 분석하고 있다. 그런 마당에 일본 노조 간부들이 우리 노조를 친절하게 찾아와「투쟁」을 부추겼으니 개운치 않다.
미국 자동차 노사 분쟁이 한창인 틈을 타 일본자동차가 미국 시장을 석권하는 계기로 삼은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현대 중공업 노조측이 받은 돈을 일단 은행에 예치해놓고 회사측에 알린 것이나, 회사측이 이를 다시 경찰에 신고한 것은 잘한 일이다. 일본 노조측의 방문 목적 동기나 순수성이 안 밝혀진 이상 당연히 취했어야 할 조치다.
노동 운동의 자금은 노동 운동의 자주성과 관련되는 문제다. 그것이 외국 자금일 경우 더욱 그러하다. 우리 노조가 그 자주성을 자각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번 현대 중공업의 경우에 입증됐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일본의 노동계는 「부시 방문」에 관해 한마디 해명이 있어야할 것이다. 노조운동을 격려하기 위해서였다고 구실을 댈지 모른다. 그러나 투쟁 방식을 교육받아야 할 만큼 우리 노조가 취약한 것도 아니다. 오해받을 여지가 있는 일을 섣불리 했다는 사실에 대해 사과의 뜻이 해명에 포함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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