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사는 윤리 아쉽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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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백왈 세법도 방귀 한번에 권위를 잃는다고 한다. 어느 체제에서건 가장 존경받고 넉넉한 생활을 해왔던 의사들이 국민건강을 담보로 의료보험수가 인상투쟁을 하다가 결국 물러서고 말았다.
×자 표시의 괴상한 마스크를 착용하고 꽹과리를 치며 은행장실을 점거했던 은행원들도 임금인상안에 극적인 타결을 보고 투쟁장비를 거두어 들였다. 그러나 양쪽 모두 존엄을 잃었다.
최근 며칠동안 은행 주변의 풍경이 확 바뀐데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은행 문을 들어서는 고객들마다 『어-』하며 어리벙벙해 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깐깐해 뵐 정도로 단정한 옷차림의 은행원들은 온데간데 없고 그들이 의당 있어야할 창구는 청바지에 울굿불굿한 티셔츠 바람의 시위자들이 차지했다.
행원들의 갑작스런 정복착용거부시위는 지금까지 은행이 보였던 친절과 신뢰성의 분위기를 깨뜨렸다.
그같은 시위는 6개 시중은행노조간부들이 13일 일제히 각 은행장실을 기습 점거하면서 동시에 시작되었다. 22·9%의 임금인상 투쟁이었다.
『우리는 이미 화이트칼러가 아니다』라고 그들은 주장했다. 스스로를 블루칼러라고 불러 마땅하다고 설명한다.
지난주에는 고소득층인 의사들이 의료보험수가 30·5% 인상을 요구하며 세미나참석을 이유로 집단휴진을 위협했다. 일부 의사들이 가운을 벗어던지고 진찰실을 나가는 통에 어린이 환자들이 치료도 못받은 채 법원앞에서 돌아서는 일도 있었다.
『의원이 도산하지 않을 정도로 올려주어야 한다』며 기어코「의보요양 취급기관 지정서」까지 반납하는 소동까지 벌였다.
금융기관 중에서 봉급수준이 꽤높은 것으로 알려진 증권회사 쪽에서도 들썩거리고 있다. 작년 평균 인상률 20·5%(상여금포함)의 2배를 훨씬 넘는 50% 요구안을 놓고 경영자측과 맞서고 있다.
지난 2년동안 무경험·무원칙한 상태에서 때로는 격렬한 대립으로 치닫기까지 했던 임금인상투쟁이 지식산업으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생산직 근로자들의 우려할만한 임투시위에 대해서 늘 자제하라고 주문했던 지식인층도 정작 자기 문제에 부닥쳐서는 보다 큰 몫을 차지하기 위해 지성도 팽개치고 덤벼든다는 국민의 비아냥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든다.
의사들은 『왜 우리만 희생돼야 하느냐』하고 은행원들은 『우리가 언제까지나 말 잘듣는 준공무원이어야하느냐』고 어기찬 논박을 하며 자기중심적 이익논리를 전개한다.
이른바 화이트칼러로 불리는 지식산업 노조나 단체들이 「균형」대우를 요구하면서 20∼30%이상의 고율임금인상안을 내밀고 이를 받아들이도록 집단휴진이나 금융산업마비 등 강도높은 투쟁수단을 동원하려 했던 것은 소외된 계층에 적지 않은 분노를 안겨주고 있다. 사태가 이럴진대 누가 누구를 이끌어 갈 것이며 누가 누구를 본받을 수 있을 것인가.
금년도에 9·7%의 봉급인상으로 자족하는 말단 공무원들의 심정은 어떨것인가.
결국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국민이 뽑아준 국회의원들이 그들의 세비를 무려 87%나 올리겠다고 나선 적도 있었다.
두자리 숫자 임금인상이 물가에 어느정도 파급효과를 미치며 새로운 임금인상선이 생산직 근로자들에게 어떤 의미를 줄 것인지는 화이트칼러에게조차 논의의 대상이되고 있지 않은듯하다.
블루칼러들은 임금격차를 최대한 줄여 균형과 평행적 대우가 이루어지도록 요구해왔다. 정부는 노사협상에서 화근이 될 임금인상 가이드라인 지정을 극력 피하면서도 대폭적인 임금인상이 몰고올 인플레를 걱정했다.
고율임금인상을 관철하기위해 화이트칼러가 어거지를 부리는 집단의 힘을 자제하지 않는다면 블루칼러의 소득 보상적 욕구가 또 촉발될 것이다. 지식인 노동의 공공성·윤리성이 도외시된채 큰 몫을 차지하기 위한 그들 특유의 집요한 로비활동이 강화된다면 악순환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누가 이 사회의 리더인가. 정치인·경제인 및 전문직종의 종사자들이 자기 몫의 배분에 정도 이상의 욕심을 부리며 더 이상 화이트칼러가 아니라고 스스로 부정할 때 일반근로자계층의 상대적 빈곤감·박탈감은 더욱 커질 것이다.
학생들의 총장실 점거와 같은 투쟁수단이 지식인들에 의해 재연출되고 일시적이나마 의보취급기관 지정서를 반납하는 집단적 행위가 일어났다는 것은 한국 지성의 비극이 아닐수 없다.
지식인들은 좋든 싫든 그들의 행동에 늘 도덕적인 이유를 내걸줄 아는 사람들이다. 스스로 행동규범을 보이지 않고서는 사회적 대우도 뒤따르지 않는다.
울어야 젖을 얻어 먹을수 있는, 아직은 미성숙한 노사관계라 할지라도 화이트칼러는 좀더 수준높은 대화와 고급스러운 시위문화를 만들어내야 한다.
어려울 때 우리네 어른들은 자신의 배를 덜 채우면서도 식솔들을 위해 밥을 남기는 미덕을 가졌다.
한정된 상황에서 자기 몫을 조금덜어내는 일이란 결코 쉽지 않다. 그것은 때로는 고통을 동반한다.
있는자를 포함한 지식산업인들은 결코 밝지않은 우리경제를 길게 보고 더불어 사는 윤리를 생각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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