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만여 평 황무지가 시민의 푸른 쉼터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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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참으로 호젓한 길이다. 시원하게 뻗은 도로를 따라 느티나무 가로수가 길게 이어져 있다. 그 옆에는 또 다른 나무 길이 연이어 나 있다. 무등산의 녹음이 바로 이 푸른 길을 통해 도심으로 이어졌다. 이른바 '그린 웨이'가 광주에 만들어진 것이다.

곳곳에 자생식물을 중심으로 야생화 꽃밭이 자리하고 있다. 푸른길의 중간 중간에는 작은 공원이 숨어 있다. 산책을 즐기거나 여기저기 벤치에 앉아 한가롭게 쉬는 시민이 적지 않았다. 광주의 한 시민은 "푸른길을 걸으면 행복지수가 올라갈 것"이라고 했다.

광주 시민이 철도 폐선부지를 생명의 길로 일궈 희망과 행복을 키우고 있다. 광주 시민이 자랑할 만한 이 길은 원래 도심 깊숙이 들어와 있던 경전선(경상도~전라도) 철로 자리다. 철도청은 도심을 지나는 탓에 소음.교통방해 등 부작용이 많은 10.8km 구간을 2000년 도시 외곽으로 이설했다. 띠 모양의 폐선부지가 생겼고, 광주시와 시민들이 힘을 합쳐 광주역~옛 남광주역~동성중 구간의 길이 7.9㎞, 너비 8~15m, 넓이 10만7915㎡에 선형(線型) 녹지공간을 가꾸고 있는 것이다.

2003년 1월 착공한 푸른길은 조선대 정문~남광주 네거리 0.54㎞와 광주천변~백운광장 1.76㎞ 구간이 완공됐다. 시민 헌금을 포함해 30억여원을 들여 크고 작은 나무 23만여 그루를 심고 그 사이에 산책로.자전거도로를 냈다. 또 45곳에 쌈지공원과 쉼터를 조성했다. 현재는 백운광장~동성중 2.4㎞ 구간 공사가 한창이다. 나머지 구간도 2008년까지 끝난다.

올 연말께는 푸른길 10.8㎞의 의미를 담은 타일 1080개로 남구 주월동 장산초등학교 부근에 환경벽화를 설치하기 위해 초.중.고생과 시민들로부터 타일을 기증받고 있다.

광주 지역의 건축인들은 이 길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도록 설계하는 데 발벗고 나섰다. 길을 걷노라니 여러 공공기관과 단체, 기업들이 자신들이 비용을 부담해 작은 정원이나 편의시설을 만들어 놓은 게 보인다. 작은 공원을 만들어 헌납하니 많은 시민이 혜택을 보고, 자신들을 홍보하는 효과도 있으니 일석이조다.

길 중간 중간에는 만남과 공연을 위한 광장이 만들어져 작은 음악축제들이 열리곤 한다. 이곳에서는 라이브 공연이나 청소년들의 힙합 무대, 전시회 등도 열릴 예정이다. 숲이 새를 부르듯, 꽃이 나비를 부르듯 좋은 공원은 문화와 예술을 부르게 마련이다.

아시아 문화 중심 도시를 꿈꾸는 광주에서 수천억원짜리 건물이 아니라 바로 이런 시민 중심의 작은 공원이나 축제.문화가 더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가장 주목할 부분은 시민의 참여다. 푸른길의 나무나 시설물 상당수가 시민 모금으로 만들어졌다. 100만 그루 시민헌수운동을 벌여 현재까지 2억5000만원가량이 모였다.

마치 서양의 공원에 가면 볼 수 있듯 나무나 작은 벤치에도 기증자 이름이 앙증맞게 붙어 있다. 가족 이름으로 기증된 게 많다. 광주의 푸른길 프로젝트는 계획단계에서 길 조성 단계에까지 시민의 참여와 힘이 바탕이 됐다. 사실 모든 게 쉬웠던 것은 아니다. 처음 시민단체들이 폐선 부지를 공원화하자고 할 때만 해도 시 당국은 말할 것도 없고 시민들도 시큰둥했다.

그러나 광주환경운동연합과 광주시민환경연구소 등 지역의 풀뿌리 단체들과 뜻있는 건축인.문화인.지역언론의 캠페인이 해를 거듭해 계속되면서 지지자가 늘어나 힘이 붙기 시작했다. 시민들이 스스로 나무를 심고 그것이 숲이 돼 도심의 좋은 공원으로 발전하리라는 청사진과 설득에 경전철을 놓겠다고 하던 광주시도 마음을 바꾸었다. 시민단체들이 공청회를 열어 주민의 의견을 모으는 한편 당국자.전문가와 머리를 맞댔다. 그 결과 전국에서 최초로 철로의 전 폐선구간을 공원화하기에 이르렀다. 이뿐만 아니라 설계 과정에서부터 시공 과정, 나아가 공원 관리에 이르기까지 주민이 맡는 주민 참여의 귀한 선례를 만들었다.

서울의 청계천이나 광주천 살리기는 정치인이 주도해 시작된 것이다. 애초 기획과 추진 과정에서 시민들의 참여가 배제됐고, 그로 말미암아 미숙하거나 잘못된 점이 적지 않았다. 실적 또한 정치인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광주의 푸른길 공원은 시민 주도로 시작되고 시민이 직접 만들었기 때문에 가장 자연스럽고 쾌적한 공원이 됐다. 매우 바람직한 모델이 아닐 수 없다. 이 푸른길 공원의 성공 사례는 얼마 전 5.31 지방선거에서 당선된 자치단체장들에게 외치고 있다. "시민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자발성을 존중하며, 그들의 마음을 느끼라고."

박원순 희망제작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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