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허담 회담의 평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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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김영삼 민주당 총재가 지난 6일 모스크바에서 허담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장을 만난 사실을 우리는 우선 잘된 일이었다고 평가한다.
6공화국에 들어선 후 남북한 접촉 중에서 가장 고위급에 속하는 모스크바 회담은 서로의 견해차를 확인한 것 이상의 성과는 없이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회담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유는 몇 가지 있다. 6공화국이 들어선 이래 북한은 한국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에 대한 잘못된 현실 인식을 대남 정책의 바탕으로 삼아왔다. 모스크바 회담에서 김총재가 한 발언과 행동은 이 점을 북한 당국자들에게 분명히 지적했다고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것은 김총재가 허담으로 하여금 『상대방을 타도·전복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고 있다』는 현실인식을 이끌어낸 사실이다. 북한이 그런 현실인식을 말로만이 아닌 행동으로 보일 때 남북관계는 이견을 극복하고 실질적인 진전을 보일 수 있다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 모스크바회담의 성과라고 우리는 본다.
지금까지 북한은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문익환목사의 방북 및 전대협 학생들의 「평양 청년축전」초청 과정에서 일관되게 정부 대 정부의 접촉을 기피함으로써 남한 내부에 갈등과 교란의 씨를 뿌리려는 생각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모스크바 회담은 그런 의도를 한 단계 높여 보수야당의 총재까지 제2의 문 목사로 삼으려 했던 것 같다. 만의 하나 김총재가 허담의 권유대로 김일성을 만났거나 북이 미리 마련한 공동 보도문 발표에 동의했더라면 남한의 내부 분열을 통해 지금까지의 대남 전략으로 계속 시도해 볼만하다는 확신을 북의 지도층은 갖게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 허황된 현실감각에 충격을 줬다는 점에서 모스크바회담에서의 이견 확인은 큰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한국 정부가 7·7선언이래 계속 제시하고 있는 전향적 대북 제의나 이에 반해 북한이 시도해온 교란정책이 모두 남북한 관계가 걸어가야 할 장정의 척도로 보면 서로간의 초기 탐색 단계에 불과한 것이라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이 초기 탐색단계에서 한국이 「타도의 대상」이 될 수 없고 교류는 정부간 창구 일원화를 통해 이루어져야 된다는 자신감과 국론의 합의가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에 북한 지도층이 눈뜨게 만드는 일은 중요하다.
그와 같은 북한의 현실인식 없이는 남북관계는 또 다시 반전의 위험에 빠져들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같은 민족이지만 한차례 전쟁을 치렀고, 그 후 여러 차례 북한의 테러행위로 희생을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선의로 남북한 관계의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미래를 지향하려 노력하고 있다. 북한은 이 선의를 취약점 탐색의 기회로 악용하려는 시도를 이제 그만두고 공식대화의 광장으로 나오기 바란다.
김총재의 자세는 남북문제에 관한 한 당략보다 국익을 우선시킨 초당 외교의 기틀을 잡았다는 점에서도 평가할 만하다.
정부도 북한의 초기탐색에 과잉반응을 보이지 말고 김총재가 보인 것과 같은 의연한 자세로 원래의 대북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북한 현 지도층의 오판을 바로잡게 하거나 최소한 북한내 실용주의세력의 등장을 고무시킬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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