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규의 지리산 가을편지] 오토바이, 그 눈물의 속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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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모처럼 오토바이를 타고 먼길을 다녀왔습니다. 옛 사람들이 산천을 누비며 타던 말과 가장 닮은 것이 바로 오토바이입니다. 나의 '백마'는 풀잎 대신 휘발유를 마시고 말발굽 소리를 내며 푸다다 달리지요. 오토바이를 타는 것은 바람의 정면에 서는 것.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몸을 기대며 눈물을 흘리며 바람에게 목숨을 내맡기는 일입니다.

20대 초반 막장 광부로 일할 때 시작된 오토바이 경력은 자나깨나 시를 쓰는 나의 시력(詩歷)과 비슷합니다. 내 몸이 바람인지 바람이 내 몸인지, 오토바이 타고 시를 쓴 것인지 시를 쓰며 오토바이를 탄 것인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그 동안 아홉 대의 오토바이로 35만㎞의 국도를 달렸으니, 지구를 일곱 바퀴 돌고도 남는 거리입니다.

봄이면 북상하는 꽃의 속도로 전국을 일주하고, 가을엔 남하하는 단풍의 속도로 달렸지요. 오토바이 질주는 분명 위험한 일이지만, 따지고 보면 이 세상에 위험하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만 꼭 필요한 것은 고도의 집중력. 그 집중력이 바로 삶의 밑천, 문학의 밑천 아닌지요. 오토바이, 그 눈물의 속도는 백척간두 진일보의 꽃입니다.

이원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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