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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상하이에서 일어난 ‘중국 최초의 누드 모델 풍파’

중앙일보

입력

중국 봉건사회 후기 인체미에 대한 인식은 우매하고 왜곡된 것으로 특히 여성에 대해서는 더 심했다. 전족이나 가슴 조이기 등 봉건적인 관습은 육체와 정신을 옭아매 중국 여성들의 심신 건강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20년 류하이쑤(劉海粟, 1895~1992)의 회화누드모델 풍파는 중국에 거대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후 해방을 추구하는 여성들은 더이상 자신을 봉건이란 낡은 천 쪼가리로 속박하려 하지 않았다.

책 '옷으로 읽는 중국문화 100년'을 읽던 중 흥미로운 대목이 눈을 사로잡았다. 1920년 상하이에서 일어난 '회화누드모델 풍파'에 관한 이야기다.

20세기 중국 미술사의 가장 쇼킹한 사건은 실물 드로잉 수업을 둘러싼 류하이쑤와 보수주의자들의 논쟁이다. 류하이쑤는 당시 근대적이고 반항적인 예술가의 표본이었다.

류하이쑤(劉海粟)

류하이쑤(劉海粟)

그는 1914년 상해미술아카데미 교과과정에 '유럽식 모델 드로잉'을 도입했다. 석고상이 아닌 '살아있는' 육체를 모델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모델을 구하는 일부터가 난관이었다. 류하이쑤는 먼저 남자 모델 공고를 냈다. 15세 소년이 자원했지만, 발육이 덜 된 소년의 사생에 학생들은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이후 높은 보수를 내걸고 중년의 모델을 공모했으나, 막상 선발된 모델들은 나체로 여러 사람 앞에 서는 것이 꽤나 난감했는지, 금세 도망가고 말았다.

1917년 5월, 상하이 미전 학생과 교제 중이던 한 여학생이 류하이쑤를 찾아왔다. 청둥여학교에 다니던 천샤오쥔(陳曉君)은 '비너스' 드로잉에 한계를 느낀다는 애인의 말에 누드모델을 자청했다.

상하이미전 학생들과 천샤오쥔(陳曉君)

상하이미전 학생들과 천샤오쥔(陳曉君)

그 해 여름, 학생전람회에 누드 사생 50점이 전시됐다. 그림을 본 사람들은 아연실색했다. 청둥여학교 교장은 공개적으로 류하이쑤를 비판하고, 천샤오쥔을 퇴학시켰다. 나체의 여성을 그렸다는 사실에 장쑤성 교육회 또한 제재에 나섰고, 이에 맞서 류하이쑤가 공개변호를 했지만 당시 상하이 의원과 상회로부터 '금수보다 못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상하이(上海)현 현장이었던 워이다오펑은 인체사생 금지령을 내렸고 이에 류하이쑤는 격노했다. 류하이쑤는 신문에 당시 5성(省)연합군 통수 쑨촨팡에게 쓰는 편지를 공개했고 두 사람 사이에 필전이 오갔다. 군벌정권과 예술의 자유독립에 대해 공공 논쟁을 벌인 것이다. 이 모델 파동은 10년이 지난 뒤에야 잠잠해졌다.

당시 중공당국은 이같은 형태의 모델 드로잉을 억압하려 했다. 그러나 당시 상해미술아카데미의 교장이었던 류하이쑤의 '누드 모델 투쟁'은, 중국 미술사에 한 걸음 진보를 가능케 했다. 류하이쑤는 1912년 중국 최초의 미술학교인 상해도화미술원(上海图画美术院)을 설립한 후, 이 학교를 해파(海派) 단체의 상업 전통에서 분리시키고 근대적 의미의 순수 학술교육기관으로 개혁하고자 했다.

그는 죽는 날까지, 누드를 장려하고 중국의 봉건문화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애썼다. 중국의 외국혐오증과 변치 않는 보수주의를 타파하기 위한 길은 쉽지 않았지만 자신의 사상에 자부심을 가지고 임했다. 류하이쑤는 린펑멘(林風眠)과 쉬베이훙(徐悲鴻)과 더불어 20세기 중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었던 미술교육가였다.

차이나랩 임서영

참고문헌 및 논문
옷으로 읽는 중국문화 100년 (공)저: 위안저, 후웨
줄리아 앤드류스, 2005, 『Art and the Cosmopolitan Culture of 1920s Shanghai』, 오하이오대
이보연, 2011, 『류하이쑤의 초기 미술활동 연구(1912-1935)』, 칭화대학교

네이버 중국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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