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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희생자의식 민족주의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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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3호 31면

문소영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

문소영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

“이 사람들, 정말 아름답지 않습니까?” 1930년대 독일 사진기자 벨첼이 자기 동네에 사는 집시 일가를 찍은 사진을 영국 리버풀의 출판인에게 보내며 한 말이다. 유럽인이 집시를 바라보는 시각은 늘 이중적이었다. 낭만적 동경의 대상이자 위험한 타자. 벨첼은 다른 독일인보다 훨씬 진지하게 집시들에게 다가갔고 그래서 집시들은 마음을 열고 카메라 앞에 섰다. 그러나 나치가 집시를 잡아들이기 시작하자, 그는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러 온 집시 여인들을 외면했다. 결국 그가 찍었던 집시들 대부분이 수용소에서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

벨첼의 사후에 그의 사진들이 리버풀 대학 도서관에서 발견됐다. 그들 중 집시여인 운쿠의 가족사진이 지금 한국국제교류재단 KF갤러리의 ‘이웃하지 않은 이웃’ 전시에 나와 있다. 운쿠 가족의 즐거운 일상이 담긴 벨첼의 사진들과 그들이 수용소에서 죽음 직전 찍은 사진들이 나란히 걸려 있어 전율을 일으킨다. 벨첼은 악의에 찬 적극적 가해자가 아니었지만, 결국 그도 집시를 타자로 여기고 죽음을 방관했으니 간접 가해자였다. 영국 학자와 이 전시를 공동 기획한 임지현 서강대 교수는 전시 서문에 이렇게 못박았다. “특별히 악하지 않은 보통 사람들도 계기만 주어지면 홀로코스트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 한국 사회 또한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에 안주한 채 새로운 시대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는 임 교수가 만든 용어로서 학계에 두루 인용된다. ‘’우리는 피해자였으니 우리의 배타적 민족주의는 정당화된다‘는 집단의식을 말하는데, 이런 의식이 강한 나라로 나치 시절 독일, 지금의 이스라엘, 폴란드, 한국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전시에 대한 포털 기사에조차 “나치와 다름없는 일제”를 규탄하는 댓글만 올라올 뿐, 전시 의도대로 우리 한국사회의 타자 배척을 자성하는 댓글은 없었다.

물론 우리는 부당한 피해를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부당한 가해도 기억해야 한다. 예를 들어 1931년 ’평양 화교 학살‘ 사건은, 일제의 이간질도 있었지만, 거짓 소문에 흥분한 조선인들이 무고한 화교 120여 명을 학살한 사건이었다. 우리는 늘 희생자이지만은 않았다. 더구나 지금처럼 GDP 세계 12위 국가가 된 뒤에는 말이다. ’이웃하지 않은 이웃‘ 전시는 한국 내 이주노동자 및 결혼이주여성의 사진들로 끝을 맺는다. 지금 우리가 봐야 할 전시다.

문소영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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