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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욕적 왜군 포로의 삶, 강항이 한 죽음보다 중요한 일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김준태의 자강불식(3)

일찍이 맹자는 하늘이 어떤 이에게 큰 임무를 맡기고자 한다면 먼저 그 사람에게 실패와 시련을 준다고 했다. 그 사람을 더욱 강하게 만들기 위해서다. 여기 절망을 딛고 고난에 굽히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운명과 싸우며 자신의 역사를 써내려간 이들의 발자취가 여러분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길 기대한다. <편집자>

이순신의 진영으로 가는 도중 왜군 포로로 잡혔지만 굴복하지 않은 강항(1567~1618) [중앙포토]

이순신의 진영으로 가는 도중 왜군 포로로 잡혔지만 굴복하지 않은 강항(1567~1618) [중앙포토]

“이국땅 삼경이면 밤마다 찬서리고 / 어버이 한숨 쉬는 새벽달일세 / 마음은 바람 따라 고향으로 가는데 / 선영 뒷산에 잡초는 누가 뜯으리 …… 피눈물로 한 줄 한 줄 간양록을 적으니 / 님 그린 뜻 바다 되어 하늘에 닿을세라”

조용필이 부른 ‘간양록(看羊錄)’의 가사다. 정유재란 때 일본에 포로로 잡혀간 강항(姜沆, 1567~1618)을 노래한 것으로 ‘간양록’은 그가 쓴 책의 제목이다. 원래 강항은 죄인이라는 뜻의 ‘건거록’이라고 지었지만, 후대의 간행 과정에서 ‘간양록’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간양’이란 흉노에 포로로 잡혔지만 굴복하지 않은 한나라 소무의 일화를 가리킨 것으로 충절을 상징한다.

전란 중 군량 수송을 담당하고, 의병을 모아 왜적과 맞서 싸웠던 강항은 일가와 함께 통제사 이순신의 진영으로 가는 뱃길 도중 왜군에게 붙잡혔다. 그 길로 1597년 (선조 30년) 9월부터 1600년 5월까지 2년 8개월 동안 일본 땅에 억류된다.

이순신에게 가는 도중 왜군에게 붙잡혀

강항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내산서원. 원래 강항의 태생지에 세웠으나 1636년 인조 정권 때 화재로 인해 이건되었다. [사진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항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내산서원. 원래 강항의 태생지에 세웠으나 1636년 인조 정권 때 화재로 인해 이건되었다. [사진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항이 끌려가는 과정은 비극의 연속이었다. 뱃사공의 잘못으로 아버지가 탄 배와 헤어졌고 왜군을 피하고자 바다에 뛰어들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 와중에 “어린 아들과 딸은 조수에 밀려 떠내려가 그 우는 소리가 한참 만에야 끊어졌으며” 탈출을 시도하다 발각되어 형수와 처가 식구, 노복 등이 왜군의 손에 잔인하게 살해당했다.

병이 난 여덟 살 조카는 가차 없이 물속으로 던져지기도 했다. 강항은 꽁꽁 묶인 채 이를 지켜봐야 했는데, “단단히 얽어맨 오랏줄이 살 속을 파고 들어가 손등이 모두 갈라지고 터졌다”고 한다. 이어 강항과 그의 가족들은 대마도에서 일기도(壹岐島)로, 다시 주방주(周防州), 이예주(伊豫州)로 끌려갔다.

“굶주림과 피곤함이 너무 심하여 열 걸음에 아홉 번은 넘어질 정도”였고 조카 둘도 연이어 병으로 죽었다. “가련하고 슬프지만 도리어 그들이 죽어서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부러울 따름이다”라고 기록할 정도로, 그가 겪은 상황은 너무나 처참했다.

강항의 처지는 교토에 도착하면서 조금 나아졌는데, 그의 학문을 알아본 일본의 명사들과 교제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람이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 1561~1619), 일본 근세 유학의 시조로 불리는 인물이다. 강항은 후지와라 세이카에게 조선의 제도와 의례를 설명해주었고, 사서오경 주석서에 일본식 훈(訓)을 다는 작업을 자문해 주었다. 후지와라 세이카는 일본 내에서 영향력이 큰 인물이었기 때문에 강항 역시 그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게 된다. (후지와라는 훗날 강항이 석방되는 데도 기여했다)

일본 아이치현 대주시 건립된 강항 현장비. 강항은 일본의 명사 후지와라 세이카를 도우면서도, 일본의 정보를 샅샅이 수집해 조선에 일본과의 안보, 외교전략 수립에 꼭 필요한 자료를 제공했다. [중앙포토]

일본 아이치현 대주시 건립된 강항 현장비. 강항은 일본의 명사 후지와라 세이카를 도우면서도, 일본의 정보를 샅샅이 수집해 조선에 일본과의 안보, 외교전략 수립에 꼭 필요한 자료를 제공했다. [중앙포토]

그러나 이국땅, 그것도 조국을 침략하고 가족들을 죽게 한 원수의 땅에서 포로 생활을 한다는 것은 여전히 암담한 일이었을 것이다. 슬픔과 분노, 절망의 소용돌이 속에서 언제든 무너져버릴 수 있었다. 그런데도 강항은 어떻게든 버티고자 애썼다. “내가 구차히 산 것이 어찌 가벼운 목숨을 아까워해서겠는가! 죽지 않은 것은 장차 할 일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의미 없이 죽게 되면 부끄러움을 씻을 수가 없다.” 이 치욕을 견디고 살아남아서 훗날을 도모하겠다는 것이다.

강항이 일본의 정보를 샅샅이 수집한 것은 그래서였다. 그는 많은 사람을 만나 교류하면서 조선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자료들을 모았다. 강항은〈적중봉소(賊中封疏), <적중문견록(賊中聞見錄) 등의 글을 지었는데, 여기에는 일본의 정세와 지리, 외교, 정치, 제도, 문물, 기후, 문화, 동향 등이 상세히 정리되어 있다. (적중봉소는 강항이 포로 시절 비밀리에 조선 임금에게 보낸 상소문이다. 모두 3차례 시도되어 이 중 1부가 조정에 전달되었다)

‘임진․정유에 침략해 온 왜장의 수(壬辰丁酉入寇諸將倭數)’라는 글에서는 조선에 쳐들어온 장수들의 인적사항, 가계, 관직, 성격을 자세히 기록하기도 했다. 이러한 강항의 글들은 이후 조선의 대일본 안보, 외교전략 수립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자료가 된다.

강항이 사무치는 슬픔과 고통 속에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나라를 위한 소중한 자료를 넘긴 덕분이다. 물론 왜군의 재침을 대비해야 한다는 강항의 경고를 점점 소홀히 하여 300년 후에 또 다른 환란을 맞이하고 말았지만.

김준태 동양철학자·역사칼럼니스트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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