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꼭 할 일 있다며 70세에 사표 던진 고려 재상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김준태의 후반전(20)

해동공자로 불린 고려 학자이자 명재상 최충. ⓒpublic domain [사진 위키피디아]

해동공자로 불린 고려 학자이자 명재상 최충. ⓒpublic domain [사진 위키피디아]

고려 문종 대의 학자이자 명재상 최충(崔沖, 984~1068)은 어릴 적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글을 잘 지었다고 한다. 1005년(목종 8년) 불과 스무 살의 나이로 과거시험에서 장원급제할 정도다. 그뿐만이 아니다. 최충은 다섯 임금을 섬기며 탁월한 경세가(經世家)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정종대에는 국경의 군대를 통솔하며 국방력 강화 작업을 총괄했고 문종대에 이르러서는 재상이 돼 각종 법제 정비와 정책을 책임졌다.

70세에 갑자기 은퇴 청원한 최충

그런데 1053년(문종 7년) 최충은 갑자기 은퇴를 청원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일흔이라는 나이였다. 『예기(禮記)』 ‘곡례(曲禮)편’에 “대부(大夫, 관직에 있는 사람)는 칠십 세가 되면 일을 그만둔다”고 했으니 예법에 따라 자신도 사직하겠다는 것이다.

문종이 “최충은 유학(儒學)의 대가이며 덕이 높은 이 땅의 어른이다. 지금 비록 늙음을 이유로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고자 하나 차마 윤허할 수 없다”며 간곡히 만류했지만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처럼 최충이 사퇴를 고집한 것은 물러나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고려의 미래를 이끌어갈 젊은 인재를 양성하는 일이었다. 최충이 처음 관직에 나설 당시 고려는 혼란의 연속이었다. 임금(목종)이 신하에게 시해당했고 거란으로부터 세 차례나 대대적인 침략을 받았다. 다행히 평화가 찾아왔지만 먹고 살 일이 급해 미쳐 학문을 가르칠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현종, 덕종, 정종, 문종이 연이어 등장하며 좋은 정치를 펼쳤지만 생각만큼 효과를 얻지 못했다. 좋은 제도나 정책은 그것을 차질 없이 운용해줄 인력이 있어야 제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충 역시 자신이 다듬은 법과 제도를 올바르게 계승하고, 그 취지를 온전히 구현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원래는 국립고등교육기관인 국자감(國子監)이 그 역할을 해야겠지만 유명무실한 상태였다. 최충은 자신이라도 직접 나서서 인재를 육성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김홍도의 서당도. 서당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사학은 최충이 세운 구재학당에서 시작되었다. 최충은 학당을 열어 젊은 선비들만 모아 가르쳤는데 이 소문을 들은 학도들이 너무 많이 모여 최충이 단계별로 9개의 학교를 세우게 된 것이 구재학당이다. [중앙포토]

김홍도의 서당도. 서당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사학은 최충이 세운 구재학당에서 시작되었다. 최충은 학당을 열어 젊은 선비들만 모아 가르쳤는데 이 소문을 들은 학도들이 너무 많이 모여 최충이 단계별로 9개의 학교를 세우게 된 것이 구재학당이다. [중앙포토]

이에 최충은 처음에는 집에서 학당을 열고 “젊은 선비들을 모아 부지런히 가르쳤는데 이 소식을 들은 학도들이 줄지어 모여들어 거리에까지 넘칠 지경”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최충은 체계적이고 본격적인 교육을 위해 학업 단계별로 9개의 학교를 세웠다. 이것이 악성(樂聖)·대중(大中)·성명(誠明)·경업(敬業)·조도(造道)·솔성(率性)·진덕(進德)·대화(大和)·대빙(待聘)의 ‘구재학당(九齋學堂)’이다.

구재학당, 고려 사회 전반에 면학분위기 조성

최충이 세운 학교를 두고 과거급제를 위한 입시 위주 교육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있는데 이는 적절치 않다. 교과과정 상의 부족한 점을 지적한다면 모르겠지만, 구재학당을 설립한 목적 자체가 유교적 소양을 갖춘 관료 양성에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충의 학교를 통해 훌륭한 신하가 배출되었고 고려 사회 전반에 면학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높이 평가해야 할 부분이다.

이후 최충은 15년 동안 오로지 교육에 매진했다고 한다. 1068년(문종 22년) 85세의 나이로 눈을 감기 직전까지 강단을 지켰다. 이런 그에게 문종은 ‘해동공자(海東孔子)’, 이 땅의 공자라는 영광스러운 칭호를 내렸다.

학교를 세워 수많은 제자를 키워낸 모습이 삼천 제자를 길러낸 공자와 닮았다는 것이다. 물론 최충을 ‘감히’ 공자에 비견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었지만 후대의 누구도 인재양성을 위해 헌신한 그의 노력을 부정하지 않았다. 만약 그가 정계에만 머물며 생을 마쳤다면 이런 명예를 얻을 수 있었을까?

마지막으로 그의 유언을 덧붙인다.

“선비가 세력에 빌붙어 벼슬을 하면 끝을 잘 맺기가 어렵지만 글로써 출세하면 반드시 경사가 있게 된다. 나는 다행히 글로써 세상에 드러났거니와 깨끗한 지조로서 삶을 끝마치려 한다.”

김준태 동양철학자 역사칼럼니스트 akademie@naver.com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