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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실리콘밸리, 판교]판교기업 사옥은 주민들 '놀이터'다

중앙일보

입력

'로마의 휴일' 계단 옮겨 놓은듯한 로비  

영화 `로마의휴일` 포스터.

영화 `로마의휴일` 포스터.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면 원목으로 된 계단형 벤치가 2층까지 이어진다. 곳곳에 방석이 깔렸으며, 알록달록한 꽃과 나무가 방문객들을 반긴다. 안내 데스크에는 유니폼을 차려입은 직원 대신 2층으로 오라는 안내판만 덩그러니 놓여있다. 광화문과 강남 일대 여느 대기업 로비와는 사뭇 다른 외양의 이곳은 경기 성남 판교밸리에 있는 안랩 사옥 1층 로비다.

안랩은 영화 '로마의 휴일'에 등장하는 스페인계단을 본 뜬 계단 구조물을 사옥 1~2층 로비 공간에 조성했다. [사진 안랩]

안랩은 영화 '로마의 휴일'에 등장하는 스페인계단을 본 뜬 계단 구조물을 사옥 1~2층 로비 공간에 조성했다. [사진 안랩]

안랩은 영화 ‘로마의 휴일’ 에 등장하는 ‘스페인 계단’에서 영감을 받아 이곳을 조성했다. 오드리 헵번이 계단에 앉아 아이스크림콘을 먹는 장면으로 잘 알려진 바로 그 계단이다.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트리니타 데이 몬티 성당과 바르카시아 분수를 연결하는 이 계단은 높은 곳과 낮은 곳을 연결하는 기본 기능 외에도 지친 사람들을 쉬게 해주는 ‘거대한 벤치’라는 추가 기능도 충실히 수행한다. 여름철이면 관광객들은 이곳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휴식을 취한다. 안랩 관계자는 “로마의 스페인 계단처럼 우리 사옥 내 스페인 계단도 1층과 2층을 연결하는 단순 용도를 넘어 임직원 간, 또 회사와 지역사회 간 소통 공간의 역할을 한다”며 “사내외 행사가 열릴 뿐만 아니라 직원들이 휴식을 취하는 장소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앤공주로 출연한 오드리 헵번이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서있던 스페인 광장의 계단. 많은 관광객들이 '로마의 휴일'의 영상을 떠올리며 이곳을 찾는다. [중앙포토]

앤공주로 출연한 오드리 헵번이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서있던 스페인 광장의 계단. 많은 관광객들이 '로마의 휴일'의 영상을 떠올리며 이곳을 찾는다. [중앙포토]

판교밸리 기업들은 사옥, 특히 기업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1층 로비를 꾸밀 때도 여느 대기업과는 다르다. 높은 천장과 널찍한 공간이라는 하드웨어적 특징은 동일하지만, 그 안에 채워 넣은 소프트웨어에는 개성이 넘친다. 일반적인 기업 로비가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을 통제한다는 기본 기능에 충실한 운영체제(OS)만 구동되는 공간이라면, 판교밸리 기업 로비에는 놀이터, 휴게실, 자전거 주차장, 지역 주민 사랑방 등 다른 여러 가지 부가 기능을 추가한 '확장팩 소프트웨어'가 돌아가고 있다.

캐주얼 차림 앉아서 근무하는 보안요원

엔씨소프트 1층 로비에는 어린이집이 있다. 하루 종일 로비를 뛰어다니는 아이들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보안요원도 캐주얼 복장을 입고 앉은 상태에서 근무해 얼핏보면 유치원인지 게임회사 사옥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사진 엔씨소프트]

엔씨소프트 1층 로비에는 어린이집이 있다. 하루 종일 로비를 뛰어다니는 아이들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보안요원도 캐주얼 복장을 입고 앉은 상태에서 근무해 얼핏보면 유치원인지 게임회사 사옥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사진 엔씨소프트]

판교 엔씨소프트 사옥을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은 2가지 측면에서 '당황'한다. 일단 어느 시간에 와도 로비에 초등학교 취학 전 연령대 어린아이들이 울고 웃고 뛰어다닌다. 오전 시간대에는 부모 곁을 떠나기 싫어 우는 아이가 많다면 오후 시간대에는 부모들이 반가워 해맑게 웃는 아이가 좀 더 많지만, 시끌벅적하기는 마찬가지다. 아이들은 시도 때도 없이 곳곳에 있는 캐릭터 인형들 사이를 누비며 로비를 놀이터 삼아 뛰어다닌다. 엔씨소프트 로비 1층 입구에 자리 잡고 있는 직장 어린이집 ‘웃는 땅콩’에 다니는 아이들이다. 만 1세부터 5세까지의 직원 자녀 200여명이 다니고 있다.

엔씨소프트는 올 1월1일부터 근무자들의 복장을 딱딱한 정장 스타일의 유니폼에서 캐주얼로 바꿨다. [사진 엔씨소프트]

엔씨소프트는 올 1월1일부터 근무자들의 복장을 딱딱한 정장 스타일의 유니폼에서 캐주얼로 바꿨다. [사진 엔씨소프트]

두 번째는 정장을 입고 귀에 이어폰을 꽂은 상태로 서서 회사에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들의 ‘매의 눈’으로 지켜보는 통상의 보안요원을 이곳에선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대신 회색 스웨터를 입은 캐주얼 차림의 보안요원이 의자에 앉아서 근무하고 있다. 엔씨소프트는 지난 1월부터 로비 근무자의 복장과 근무형태를 바꿨다. 정장 차림의 불편한 복장으로 온종일 서서 일하다 보니 발과 종아리가 붓고 관절에 무리가 온다는 점을 고려해 근무 환경을 바꾼 것이다. 엔씨소프트 관계자는 “직원들이 보안요원 근무 환경을 개선하자고 지속해서 건의해 개선했다”고 말했다. 회사에 오는 외부인 눈에 비치는 딱딱한 첫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점도 고려했다. 덕분에 회사 로비에 들어서면 회사인지 놀이터인지 구분되지 않게 분위기가 달라졌다.

자전거 150대 세우는 실내 자전거 주차장

 NHN엔터테인먼트 사옥 1층 로비에 있는 자전거 주차장 바이크헹어. 자전거를 최대 150대까지 수용할 수 있다. 박민제 기자

NHN엔터테인먼트 사옥 1층 로비에 있는 자전거 주차장 바이크헹어. 자전거를 최대 150대까지 수용할 수 있다. 박민제 기자

지난달 22일 오전 9시 NHN엔터테인먼트 판교 사옥. 정문 한쪽으로 나 있는 자전거 전용 출입구에는 헬멧을 쓰고 보호구를 착용한 채 자전거를 끌고 건물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로 붐볐다. 로비 안에 최대 150대까지 자전거를 수용할 수 있는 판교밸리 최대 규모 실내 자전거 주차장 ‘바이크 행어’가 있기 때문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항상 따뜻한 로비에서 편하게 자전거를 주차할 수 있다. 자전거 주차장 한쪽에는 전문 수리 직원이 상주하는 자전거 수리점이 입주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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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출족(자전거로 출퇴근 하는 사람)인 NHN엔터테인먼트 정성열 감사팀장은 “특별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매일 자전거로 출퇴근한다”며 “상주 직원이 매일 주차된 자전거를 점검해주는데, 펑크나 바람 빠짐 같은 건 그냥 알아서 해결해주기 때문에 정말 편하다”고 말했다.

 NHN엔터테인먼트 사옥 1층 로비에 있는 자전거 주차장 바이크헹어에 자전거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다. [사진 NHN엔터테인먼트]

NHN엔터테인먼트 사옥 1층 로비에 있는 자전거 주차장 바이크헹어에 자전거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다. [사진 NHN엔터테인먼트]

동네 주민 사랑방 된 로비 도서관

네이버 사옥 로비에 있는 네이버 라이브러리. 동네 주민들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한다. 박민제 기자

네이버 사옥 로비에 있는 네이버 라이브러리. 동네 주민들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한다. 박민제 기자

네이버의 로비에는 2010년 문을 연 ‘네이버 라이브러리’가 있다. 1, 2층 합쳐 990㎡(약 300평) 규모 공간에는 국내외 잡지 250여 종, 세계 백과사전 1300여권을 포함해 디자인 및 정보기술(IT) 관련 서적 2만6000여권이 비치돼 있다. 회사 로비에 있는 도서관이지만 네이버 아이디만 만들면 시민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

 네이버 사옥 로비에 있는 네이버 라이브러리. 지역주민 친화적 공간을 꾸미는데 많은 공을 들였다. 박민제 기자

네이버 사옥 로비에 있는 네이버 라이브러리. 지역주민 친화적 공간을 꾸미는데 많은 공을 들였다. 박민제 기자

이곳은 기본적으로는 디자인&IT 전문 도서관을 표방하지만 들여다보면 인근 주민들 특히 노인들의 휴게공간 역할로 사랑받고 있다. 전문 서적을 참고하거나 시험공부를 위해 이곳을 찾은 젊은 방문자 외에도 신문이나 잡지를 보며 분위기 있는 공간에서 자기만의 시간을 조용히 보내기 위해 찾는 노년층 방문자들도 많다. 지난달 21일 오후 방문한 이곳에서 만난 인근 주민 김 모(67ㆍ여) 씨는 “무료인 데다 조용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 이곳에서 자주 시간을 보낸다”며 “우리 나잇대에는 불러주는 곳도 갈 곳도 별로 없는데 기업 로비에 이런 공간이 있어 좋다”고 말했다.

판교밸리 기업들은 어쩌다 독특한 로비를 만드는데 투자하게 됐을까. 전문가들은 로비가 단순한 입구 역할을 넘어 기업을 대표하는 ‘얼굴’이라는 점에 판교 기업들이 주목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병태 카이스트 경영대학원 교수는 “구글이나 애플, 페이스북 등 글로벌 IT기업들도 로비를 포함해 사옥을 꾸미는데 많은 돈을 투자한다. 외부 방문자에게 좋은 이미지를 주고, 내부 직원들에게 자부심을 주는 효과가 있다”고 설명했다. 판교=박민제 기자letm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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