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무대 뒤에 쓰러진 조용필···그가 왜 가왕인지 알겠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더,오래] 이준혁의 창업은 정글이다(4) 

50주년 기념 콘서트를 연 가수 조용필. 수많은 가수의 디너쇼를 하면서 유독 기억에 오랫동안 남는 이는 조용필이다. 그는 한 곡 한 곡을 마치 디너쇼를 하는 것과 똑같이 열창하며 리허설을 한다. [중앙포토]

50주년 기념 콘서트를 연 가수 조용필. 수많은 가수의 디너쇼를 하면서 유독 기억에 오랫동안 남는 이는 조용필이다. 그는 한 곡 한 곡을 마치 디너쇼를 하는 것과 똑같이 열창하며 리허설을 한다. [중앙포토]

30여 년 전 서울 하얏트 호텔서 첫 근무를 시작한 이래 100여건 이상의 디너쇼를 진행했다. 조용필, 나훈아, 이미자, 패티킴, 조영남 등 당대 최고의 가수뿐 아니라 수많은 가수의 디너쇼를 하면서 유독 기억에 오랫동안 남는 이는 조용필이다.

다른 가수들과 달리 조용필 씨는 디너쇼 이틀 전에 호텔에 도착하여 본인이 불러야 할 모든 노래를 하나하나 점검할 뿐 아니라 장비, 악기, 밴드 멤버의 상태까지 꼼꼼히 체크하고 행여 실수가 있을까 한 곡 한 곡을 마치 디너쇼를 하는 것과 똑같이 열창하며 리허설을 한다.

가왕이라 불리는 그가 왜 이렇게까지 완벽할 정도로 연습하는가 하는 것은 그의 공연을 본 관객들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다. 대부분의 관객은 두세번 이상 조용필 디너쇼를 보러오는 열성 팬들인데 일본, 대만 심지어는 미국에서까지 그의 팬들이 몰려와 공연 티켓 판매한 지 하루가 되지 않아 매진된다.

20여곡의 히트송을 부르고 서너 차례의 앙코르까지 부르고 난 후 무대 뒤편으로 내려간 조용필 씨는 언제나 쓰러져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물조차 주위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 마시지 못할 정도로 자신의 이름을 건 디너쇼를 위해 모든 에너지를 전부 쏟아 낸다. 왜 그가 한국 최고의 가수이자 가왕이란 타이틀로 불리는지 무대 뒤 쓰러진 그의 모습에서 발견한다.

공연 5분 전에 헐떡이며 나타나 리허설 한번 없이 립싱크 수준의 형편없는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있는가 하면 심지어는 개런티가 맞지 않는다고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천여명의 팬들을 외면하고 아무 말 없이 사라지는 가수도 본 적이 있다.

38대 대한민국 합참의장을 역임한 이순진 의장과 인연이 되어 가까이에서 지켜본 적이 있다. 식당에 함께 가 식사를 몇 번 한 적이 있는데 한 번도 직원들에게 반말하거나 무례한 행동을 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항상 조용히 주위에 있는 지인들의 식기를 먼저 챙기거나 불편함이 없는지 배려하는 것을 보면서 그가 왜 합참의장까지 올라갔고 전역식 때 대통령 마저 순진 형님이라 불렀는지 이해가 되었다. 권위는 직위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먼저 솔선수범하고 희생하고 헌신할 때 저절로 따라오는 명예인 것을 느꼈다.

왼쪽이 필자, 가운데 있는 분이 이순진 의장이다. 이순진 의장과 인연이 되어 가까이 지켜본 적이 있는데, 한 번도 직원들에게 반말하거나 무례한 행동을 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사진 이준혁]

왼쪽이 필자, 가운데 있는 분이 이순진 의장이다. 이순진 의장과 인연이 되어 가까이 지켜본 적이 있는데, 한 번도 직원들에게 반말하거나 무례한 행동을 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사진 이준혁]

22살 육군 소위로 임관해 수류탄 투척 훈련 중 수류탄이 폭발해 오른팔을 잃어 장애인이 된 조서환 마케팅 그룹의 조서환 회장은 모든 게 절망인 상태에서 불굴의 의지로 다시 일어나 애경그룹 마케팅 상무, KTF 부사장, 외국계 기업 사장이 되었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베스트셀러 책을 10여권 이상 출간했으며, KBS 강연 100℃ 제1회 첫 강연자로 출연하여 전국의 시청자들을 감동케 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영업 전선에서 필수적으로 해야 하는 골프를 치기 위해 오른팔이 없는 상태에서 포기하지 않고 왼손으로 혼신을 다해 연마하여 80타 중반의 골프를 친다는 사실이다. 조 회장과 함께 골프를 쳐 본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그의 집념에 탄복한다. 골프마저도 생존을 위해 마침내 터득한 조서환 회장은 틈틈이 교도소, 군부대, 사회복지시설 등을 다니며 불우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위한 강연 봉사도 하고 있다.

22살 나이에 찾아온 생각 하지도 못한 엄청난 불운에 좌절하고 주저앉지 않고 불행마저도 겸허히 받아들이고 남들이 상상하지 못한 노력으로 오늘날 마케팅계의 전설이 된 조서환 회장을 자영업 붕괴로 힘들어하는 분들이나 취직이 안 되어 실의에 빠진 청년들은 본받을 만하다.

10남매의 열 번째로 강원도 산골에서 태어나 일찍 부모를 여의고 형제들도 흩어져 초등학교 1학년을 마친 채 버스에서 껌팔이를 하며 홀로 생계를 유지하다 군대에 가기 위해 검정고시로 고졸 자격증을 취득하고 자기 점포를 갖기 위해 막노동을 하며 악착같이 돈을 벌어 퓨전 포차 짱구야 학교 가자, 도담치킨 등 외식매장을 300여개나 일 군 이휘열 대표의 성공스토리는 눈물 그 자체다.

본인이 그렇게 힘들게 돈을 벌었으면 자기를 위해서만 살 것 같은데 이 대표는 10년 이상 생활이 어려운 다문화 가정과 기초생활 보장 대상자들의 생계를 지원하고 소자본 창업협회를 만들어 생계형 창업자들을 위한 봉사활동도 열심히 하고 있다. 자신의 부를 축적하기 위해 가맹사업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좋은 브랜드를 만들어 그들의 재생을 돕고 싶어 사업을 한다는 얘기를 듣고는 머리를 절로 숙인다.

요즘처럼 자영업자가 어려운 시절이 없다고 한다. 임대료가 살인적이고 최저임금 상승으로 도저히 살아갈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들 한다. [사진 pixabay]

요즘처럼 자영업자가 어려운 시절이 없다고 한다. 임대료가 살인적이고 최저임금 상승으로 도저히 살아갈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들 한다. [사진 pixabay]

요즘처럼 자영업자가 어려운 시절이 없다고 한다. 임대료가 살인적이고 최저임금 상승으로 도저히 살아갈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들 한다. 환경적 요인이 실패를 부른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소리가 나오지 않아 피를 토하는 노력 끝에 한국 최고의 가수가 되었는데도 무대 뒤에서 쓰러질 정도로 최선을 다해 노래를 부르는 가왕 조용필, 육군 3사 출신으로 온갖 견제를 뚫고 오직 국가와 군인으로서 직분만을 생각하며 항상 배려하고 먼저 솔선수범을 보여 마침내 대한민국군 서열 1위 합참의장이 된 이 순진 의장님, 왼팔 하나라는 핸디캡을 딛고 대기업과 공기업의 최고 경영자가 될 때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불행을 헤쳐 온 조서환 회장님, 8살 어린 나이에 버스에서 껌을 팔아도 초 긍정의 자세로 외식 업계의 큰 그릇이 된 이희열 대표, 그들의 공통점은 치열하게 열정적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살았다는 점이다.

장사를 남의 손에 맡기고 11시가 넘어 어슬렁거리며 가게에 나타나 돈통만 지켜서는 절대로 성공할 수 없다. 식자재 업체에 모든 재료를 공급받고 이익이 나지 않는다고 메뉴 가격을 올리는 마음가짐으로는 폐업은 불 보듯 뻔하다.

원가를 줄이면 그것이 곧 망하는 길이다. 원가를 줄이는 것과 구매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새벽마다 도매시장에 나가 식자재의 변동가격을 체크하고 좋은 품질의 재료를 구매해 고객의 만족을 기반으로 한 이익구조를 개선하는 노력을 하지 않고는 과잉 공급 구조의 악순환을 밝고 있는 국내 외식시장에서 살아날 수 없다.

구멍가게를 해도 이 가게가 내게는 마지막 희망 구라는 절박한 마음이 없이 내일은 없다. 내일 내가 무엇이 되어 있는가가 궁금하다면 어제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를 돌아보라 말하고 싶다. 군인이던, 직장인이던, 사업가던 우연한 성공은 없다.

이준혁 전 상지대 겸임교수 theore_creator@joongang.co.kr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