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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북한 국보전'… 남·북 비교해보는 '이색 감상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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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통일 전까지 북한의 명품을 이처럼 많이 볼 수 기회는 더 이상 없을 것."(국립중앙박물관 조현종 고고부장)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북녘의 문화유산전'은 그렇게 자랑할 만하다. 북한이 소장하고 있는 석기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문화재 가운데 국보급 90점이 모였다. 문화유산에는 남북 구분이 무의미하다. 그러나 지역.시간상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남북 문화재의 '같음과 다름'을 비교해보는 재미는 남다르다. 이번 전시는 8월 16일까지 계속되며, 이후 국립대구박물관(8월 28일~10월 26일)으로 장소를 옮긴다.

#제짝 만난 세계 첫 금속활자

고려인이 서양의 구텐베르크보다 100년 이상 앞서 금속활자를 발명했다는 건 상식.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있는 '직지심경'(1377년)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책)이다. 그러나 금속활자 자체는 남아있는 게 거의 없다. 남과 북에 각 한 개씩이 있을 뿐이다. 전시에 나온 북한의 금속활자는 '이마 전'()자다. 57년 고려 왕궁터인 개성시 만월대에서 출토됐다. 가로.세로 약 1㎝다. 생김새.출토지점 등을 볼 때 고려시대 것으로 확실시된다. 남한에 있는 것은 '산 덮을 복'()자다. 역시 개성의 한 무덤에서 출토됐다. 인쇄에 사용됐던 북한 것과 달리 부장품으로 쓰였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높이 90㎝ 대형 빗살무늬토기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은 빗살무늬 토기다. 남한에서는 1971~74년 서울 암사동에서 나온 게 유명하다. 가장 큰 게 높이 50㎝ 내외였다. 그런데 94년 평양시 삼석구역 호남리 표대유적에서 나온 건 90㎝다. 한반도에서 출토된 것 중 가장 크다. 곡식을 저장했던 '독'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릇이 커진 이유는? 신석기인의 생활 변화 때문이다. 채집문화에서 농경문화로 진입한 증거로 판단된다. 암사동 유적과 달리 호남리 유적에선 조.피 등이 탄화된 형태로 발굴됐다. 시기상으로도 호남리(기원전 3000~1000년)가 암사동(기원전 4000~3000년)보다 늦다. 수확한 곡물을 저장할 대용량 토기가 필요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한반도 최고(最古)의 악기

인류가 처음 발명한 악기는 돌조각.나뭇조각을 두드려 소리를 내는 타악기였을 것이다. 하지만 '악기'로 단정할 만한 돌조각은 남아있는 게 없다. 현재 인류 최초의 악기로는 슬로베니아의 네안데르탈인 주거지에서 나온 곰 뼈로 만든 피리가 꼽힌다. 기원전 8만~4만년께의 것이다. 한반도 최초의 악기도 뼈피리다. 61년 함북 선봉군 서포항에서 발굴됐다. 기원전 2000~1000년께 새의 다리뼈를 잘라서 만들었다. 원통형 동체에 13개의 구멍을 가지런히 뚫었다. 남한 최고의 악기는 97년 광주광역시 신창동 유적에서 출토된 나무 현악기(기원전 1세기)다. 6개의 현공(絃孔)이 남은 형태로 발견됐으나 총 10개의 현을 가진 모습으로 복원됐다.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

'인왕제색도' '금강전도'의 겸재 정선(1676~1759)은 조선의 실경(實景)을 대담하게 그려낸 진경산수화의 대가다. 전시에 나온 '옹천의 파도' 에는 화면 가득 넘실대는 바닷물결과 우뚝 솟은 바위 등 정선의 힘찬 필치가 담겨있다. 옹천은 강원도 통천과 고성 사이에 있는 바위벼랑을 가리킨다. 겸재는 36세(1711년) 때 금강산을 유람하며 옹천 일대도 둘러본 적이 있었다. 겸재가 옹천을 그린 작품이 남한에도 남아있다. '풍악도첩'에 남아있는 '옹천'이다. 북한본이 통천에서 고성 쪽을 바라봤다면 남한본은 정반대 방향에서 그린 것이다. 겸재의 완숙미가 묻어나는 북한본에 비해 남한본은 필법이 다소 경직돼 보인다.

#부드럽고 근엄했던 고려인

부처인가, 사람인가. 92년 고려 태조릉인 개성의 현릉 보수 공사 중 청동상 하나가 출토됐다. 처음에는 불상으로 여겨졌다. 연구 결과 왕건상으로 밝혀졌다. 머리에 왕관을 쓰고 있고, 동상과 함께 나온 옥띠 장식이 왕건의 관에 있던 것과 모양이 같았다. 왕건은 사후 신 같은 존재로 인식됐다. 10세기 말~11세기 초 조성된 왕건상은 경기도 포천에서 발견된 철조여래좌상(10세기)과 비교할 만하다. 둘 모두 허리가 길쭉하고, 무릎 폭도 넓어 장신의 느낌을 준다. 둥글고 부드러운 뺨, 비교적 짧은 코가 강조됐다. 가늘고 긴 눈에선 강한 의지가 느껴진다. 당대 불상은 석굴암 본존불의 영향을 받았다는 해석도 있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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