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성장" 서강학파 김광두 가고 "분배" 학현학파 이제민 왔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기획재정부 등 주요 경제 부처에 ‘학현(學峴)학파’라는 말이 다시 흘러나오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최근 장관급인 국민경제자문회의 신임 부의장에 균형성장론을 내세우는 ‘학현학파’ 인맥인 이제민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를 임명하면서다. 공교롭게도 그에게 자리를 넘겨준 김광두 국가미래연구원 원장은 학현학파와는 대척점에 있던, 성장을 중시하는 ‘서강학파’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학현학파는 서울대 경제학과 출신으로 분배경제학을 가르쳤던 변형윤 서울대 명예교수를 따르는 진보 개혁적 경제학자들의 모임이다. 학현은 변 교수의 아호다. 변 교수는 주류경제학에 비판적인 개혁적 경제학자들의 모임인 ‘한국경제발전학회’를 창립했고, 성장 일변도의 한국 경제학계에 분배의 중요성을 알린 인물이다.

신임 이 부의장도 이런 색채가 엿보인다. 그는 지난해 ‘문재인 정부 출범 1년, 한국경제의 회고와 전망’ 세미나에서 “외환위기 이후 노동자의 몫이 줄어드는 대신 기업, 외국인 자본이 거둔 이익이 늘어났다”며 “노동자의 이익이 희생된 위에서 재벌, 외자의 이익이 복잡하게 상호작용한 구도”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그는 “재벌과 외자에 대해 세금을 더 걷고, 노동소득도 고소득이면 지대(기존의 부를 통해 새로운 부를 창출하지 않고도 자신의 몫을 늘리는 것) 성격을 띠는 경우가 많으므로 부유층 과세를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장을 위한 개혁으로 단기적으론 노후 사회간접자본(SOC) 개ㆍ보수, 공공부문 일자리 창출 위주의 재정정책을 펴야 한다고 제언했다. 중견기업 육성, 중소기업 개혁과 함께 부동산 투기 억제, 상가 임대차 보호 강화 등의 노력도 동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경제정책과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그간의 활동은 여당이나 진보 정치권, 정치적 성격을 띤 연구집단과 거리를 뒀다. 올해 초 한 일간지 칼럼에선 “최저임금이나 노동시간 단축 같이 경제에 충격을 주는 정책이 먼저 시행되었다”며 “노사관계가 적대적이면서 노동조합만 강해지면 경제의 성과가 나빠지고 결국 민주주의도 위협받게 된다”라고 현재의 경제 상황을 비판적으로 진단하기도 했다. 학문적으로는 진보적인 색채가 강하지만, 정치적 성향은 중도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이 부의장은 최근 중앙일보와의 전화통화에서 “정부의 경제정책과 경제 상황 전반에 대해 민생현장의 목소리와 전문가의 의견을 가감 없이 대통령께 전달하고, 필요하다면  쓴소리도 할 계획”이라며 “새 정부 들어 진행되고 있는 경제 패러다임 전환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면서 그 과정에서 발생 가능한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조언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소득주도성장의 방향성과 내용은 맞다고 보지만 보완해야 할 부분이 있다”며 “(소득주도성장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보였던) 김광두 전 부의장을 직접 만나 뵙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으려 한다”고 덧붙였다.

왼쪽부터 이제민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위원장, 강신욱 통계청장, 홍장표 소득주도성장특별위원회 위원장, 원승연 금융감독원 부원장. [중앙포토]

왼쪽부터 이제민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위원장, 강신욱 통계청장, 홍장표 소득주도성장특별위원회 위원장, 원승연 금융감독원 부원장. [중앙포토]

이 부의장 외에 현 정부의 대표적인 학현학파로는 홍장표 소득주도성장특별위원회 위원장이 꼽힌다. 문 정부 초대 경제수석을 맡아 소득 성장정책의 이론적 바탕을 제공했다. 최근에 주목을 받은 학현학파 출신 인사로는 강신욱 통계청장이 있다. 소득불평등을 연구해온 그는 지난해 2분기 소득분배 지표가 악화됐다는 통계를 내놓은 황수경 전 통계청장이 전격 경질된 뒤 신임 청장으로 임명되면서 독립성 논란을 겪기도 했다. 이밖에 원승연 금융감독원 부원장, 장지상 산업연구원장 등이 학현학파로 분류된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도 학현과의 유대가 깊다. 그가 공정위원장 후보자 시절 학현학파 인사들은 그의 국회 청문회 통과를 촉구하는 성명을 내기도 했다.

학현학파는 김대중 정부 때부터 본격적으로 현실정책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김태동 전 경제수석, 전철환 전 한국은행 총재 등이다. 노무현 정부에서는 영향력을 더 확대했다. 이정우 전 정책실장, 강철규 전 공정거래위원장, 김대환 전 노동부장관 등이 요직에 기용됐다. 노무현 정부 집권 후반기에 들어선 2006년 2월 청와대가 한국경제의 고도성장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했던 ‘서강학파’를 겨냥해 “서강학파는 압축성장이라는 시대적 역할을 마치고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했다”는 글을 올린 배경에는 학현학파의 영향이 작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서강학파는 남덕우 전 국무총리와 이승윤ㆍ김만제 전 경제부총리 등 서강대 교수 출신들이 이끈 학자ㆍ관료 집단으로 박정희 정부 때부터 정부의 수출 주도, 중화학공업 중심의 정책을 진두지휘해 왔다. 2017년에는 ‘서강학파가 본 한국경제 현 상황에 대한 진단과 전망’ 세미나를 열고 ‘소득주도 성장론은 근거 자료와 논리가 미흡해 되레 경기 위축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조순학파’가 서강학파ㆍ학현학파와 함께 한국 경제학계의 3대 학파로 꼽기도 한다. 한국 경제학의 거두인 조순 전 경제부총리를 따르는 제자 그룹을 칭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 김낙년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조교 시절 설날 때는 동료들과 함께 변 교수님과 조 교수님 댁을 모두 찾아 세배를 드렸다”며 “두 학파를 구분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라 말했다.

그는 학현ㆍ조순학파로 분류되는 학자들과 사제ㆍ선후배지간으로 얽혀 있는 국내 대표적인 경제사학자이다. 김 교수는 “다만 학현학파는 분배를 조금 더 중시하고, 조순학파는 성장에 대한 관심이 좀 더 크다는 게 미세한 차이”라면서 “학현학파에는 유학을 가지 않고 서울대에 남아 박사학위를 마친 학자들이 많은데, 그러다 보니 당시 경제정책에 좀 더 비판적인 시각을 가졌던 것 같다”라고 덧붙였다.

관가에선 지난해 6월 홍 위원장이 경제수석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학현학파의 위상이 축소되는 게 아니냐는 관측도 있었다. 그러나 이 부의장이 새로 임명되면서 현 정부 경제정책에도 여전히 영향력을 유지할 것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경제부처 고위 인사는 “학현학파는 정부 정책의 이론적 배경을 하는 씽크탱크 역할을 하는 외곽조직으로, 정부ㆍ여당 인사들과 친분이 두텁다는 점에서 입지가 탄탄하다”며 “다만 최근에는 현 정부를 지지하지만, 소득주도 성장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견해를 보이는 경우도 적지 않다”라고 전했다.

세종=손해용 기자 sohn.yong@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