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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만에 잡힌 태양다방 살인범…대법 흔든 편지 1통[판다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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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다⑩]  

‘부산 태양다방 여종업원 살인사건’ 기억 하시나요? 2002년 5월 31일 부산의 한 바닷가에서 손발이 청테이프로 묶인 채 수십 차례 칼에 찔린 20대 여성의 시신이 발견됐습니다. 용의자를 특정하지 못해 미제로 분류됐던 이 사건은 살인사건의 공소시효를 폐지한 이른바 ‘태완이법’으로 인해 2015년 재수사가 이뤄지며 다시 조명을 받게 됩니다. 결국 경찰 장기미제전담팀의 수사 끝에 2년 뒤인 2017년 용의자 양모씨가 검거됐습니다.

그런데 최근 대법원은 이 사건을 재수사하라고 판결했습니다. 수사기관은 물론 1·2심 모두 양씨를 범인으로 지목했는데 말이죠. 대법원이 이 사건을 다시 수사하라고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2002년 5월 부산 사상구의 한 다방 여종업원을 살해한 피의자가 피해자 통장에서 돈을 찾는 모습이 찍힌 은행 폐쇄회로TV(CCTV) 사진. [부산경찰청 제공]

2002년 5월 부산 사상구의 한 다방 여종업원을 살해한 피의자가 피해자 통장에서 돈을 찾는 모습이 찍힌 은행 폐쇄회로TV(CCTV) 사진. [부산경찰청 제공]

지문·혈흔도, 흉기도 없이 발견된 20대 여성 시신 한 구 

일단 사건의 경위는 이랬습니다. 2002년 5월 31일 손발이 청테이프로 묶인 채 수십 차례 흉기로 찔린 당시 21세의 피해자 이모씨의 시신이 부산의 한 바닷가에서 발견됐습니다. 시신은 부패된 상태로 발견돼 사망 추정 시간을 알기 어려웠습니다. 시신에서는 범인을 특정할 만한 DNA나 지문 등이 검출되지 않았고, 목격자는 물론 흉기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피해자의 사망 추정 시간 이후 피해자의 통장에서 예금이 인출되고 며칠 뒤 적금까지 깬 사실이 경찰 수사 결과 드러났습니다. 경찰이 은행 CCTV를 통해 인출한 한 남성을 찾아냈지만 모자를 쓰고 있고 CCTV 화질이 흐려 용의자를 특정하지 못했죠. 결국 미제 사건으로 남게 됐습니다.

그로부터 13년이 지난 이후 이른바 ‘태완이법’으로 2015년 공소시효가 남아 있는 살인사건 등의 시효가 폐지됐습니다. 부산 경찰청은 미제사건 전담팀을 구성해 본격적인 보강 수사와 CCTV의 용의자를 공개 수배해 결국 양씨를 검거했습니다. 검거될 당시 양씨는 2004년 여성들을 흉기로 위협해 청테이프로 묶고 강간하려 한 혐의 등으로 총 10년6개월형을 복역한 후 2014년 출소한 후였습니다.

2002년 부산 사상구에서 발생한 다방 여종업원 살인사건 피의자가 무려 15년여 만에 경찰에 붙잡혔다. 사진 속 빨간 동그라미는 15년전 발견된 살인사건 피해자 시신이 담긴 마대자루. [사진 부산경찰청 제공]

2002년 부산 사상구에서 발생한 다방 여종업원 살인사건 피의자가 무려 15년여 만에 경찰에 붙잡혔다. 사진 속 빨간 동그라미는 15년전 발견된 살인사건 피해자 시신이 담긴 마대자루. [사진 부산경찰청 제공]

"난 죽이지 않았다. 통장이 든 가방을 주웠을 뿐"  

검거된 후 양씨와 수사기관의 주장은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경찰에 검거된 후 재판까지 양씨는 ‘나는 피해자를 죽이지 않았다’고 주장했습니다. 피해자의 통장에서 예금과 적금을 인출한 사실만 인정했지요. 그는 “피해자의 가방을 주웠고 그 안에 있던 수첩 메모를 통해 비밀번호를 유추해 돈을 인출했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양씨가 피해자를 살해했다는 직접 증거, 즉 양씨의 DNA나 지문이 피해자에게서 발견됐다거나 양씨가 피해자를 살해하는 장면을 직접 본 목격자는 없었습니다.

경찰 "직접증거는 없지만, 간접증거가 양씨만을 가리켜" 

하지만 수사기관은 양씨의 주장을 반박했습니다. 일단 양씨가 통장 비밀번호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 가장 큰 증거였습니다. 수첩 메모를 통해서 비밀번호를 유추할 수 있을 리가 없으므로 양씨를 납치·협박해 비밀번호를 알아냈을 거라는 설명입니다. 양씨의 당시 동거녀가 “물컹한 내용물이 담긴 마대자루를 함께 옮겼다”고 한 진술도 증거로 제출했습니다. 양씨가 청테이프로 여성을 제압하는 ‘범죄 성격’이 있다는 점도 제시했죠. 양씨가 당시 경제적으로 곤궁해 범행 동기가 충분하다는 점도 덧붙였습니다.

여기서 법정 드라마나 영화에 자주 나오는 멘트 중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형사재판에서 유죄의 인정은 법관으로 하여금 합리적인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공소사실이 진실한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하는 증명력을 가진 증거에 의하여야 한다. 그와 같은 증거가 없다면 설령 피고인에게 유죄의 의심이 간다 하더라도 피고인의 이익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1·2심 재판부와 대법원은 모두 양씨 사건에 이 판례를 인용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1·2심, 무기징역 선고…"간접증거 종합하면 범죄 인정돼"

일단 하급심 재판부는 양씨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습니다. ‘피고인의 이익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고 했지만 바로 뒤에 이같이 밝히면서 말이죠.

“다만 그와 같은 심증이 반드시 직접증거에 의해 형성돼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간접증거가 범죄사실에 대한 완전한 증명력을 갖지는 못해도 전체 증거를 종합적으로 고찰해 증명력이 있는 것으로 판단되면 간접증거로도 범죄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  

하급심 재판부는 양씨 동거녀의 증언, 양씨의 인출 사실, 동종 범죄 전과, 경제적 궁핍으로 인한 범행 동기 등 간접증거를 ‘종합적으로 판단’해 유죄로 인정한 셈입니다.

대법, 수사기관의 '간접증거' 하나하나 반박 

반면 대법원은 이렇게 밝히며 양씨의 유죄를 입증한 간접증거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살인죄 등과 같이 법정형이 무거운 범죄의 경우에도 직접증거 없이 간접증거만으로 유죄를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공소사실에 대한 관련성이 깊은 간접증거들에 의해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 간접증거에 의한 하나하나의 간접사실은 그 사이에 모순이 없어야 하고 논리의 경험칙, 과학법칙에 의해 뒷받침돼야 한다” 대법원은 판결문을 통해 하급심과 수사기관의 논리를 하나하나 깨 나갔습니다.

일단 양씨의 동거녀 진술에 제동을 걸었습니다. 동거녀의 주장에 따르면 양씨와 동거녀는 ‘물컹한’ 마대자루를 함께 차로 옮겼습니다. 하지만 그 후 양씨가 그 마대자루를 어떻게 했는지는 기억하지 못했죠. 결국 양씨가 혼자 그 마대자루를 처리했다는 의미입니다. 재판부는 “마대자루가 피고인 혼자서 끌 수 있을 정도 무게라면 피고인이 스스로 마대자루를 자동차 트렁크에 싣고 내릴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 굳이 범행이 탄로날 위험을 무릅쓰고 동거녀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고 밝혔습니다. 마대자루의 ‘색’을 기억하는 동거녀가 마대자루가 그 후 어떻게 처리됐는지 기억하지 못한다는 점도 의문스럽다고 했죠.

비밀번호를 알게 된 경위에 대해서도 대법원은 ‘원심 판결에 모순이 있다’고 했습니다. 원심 재판부는 “2002년 5월 22일 새벽에 피해자가 살해당했다”고 하면서도 “당일 오전 피해자를 협박해 양씨가 비밀번호를 알아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당시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법의관은 “부패한 시신에서 사망 일시를 추정하는 것은 매우 어려우며, 이 건도 수사관이 제시하는 변사자의 행적에 근거해 사망시기를 추정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밝혔습니다. 대법원은 청테이프를 통한 살해 방식의 유사성과 경제적 결핍도 양씨의 범행을 입증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진범 따로 있을 수도"  

게다가 대법원은 ‘제3의 인물’이 범행을 저질렀을 가능성을 더 깊이 살펴봐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수사 당시 유력 용의자로 꼽혔던 이모씨가 바로 그 인물입니다.

피해자와 친분이 있던 이씨는 양씨의 은행 CCTV가 발견되기 전까지 유력 용의자였습니다. 줄곧 피해자와 연락하던 이씨는 피해자 사망 이후 전혀 연락한 흔적이 없었습니다. 사망 추정 시간으로부터 39시간 동안 휴대폰과 인터넷을 사용한 ‘생활 흔적’도 거의 발견되지 않았죠. 그에겐 특수강도 전력도 있었습니다.

대법원은 “직접증거가 없는 이 사건에서 수사 초기 유력 용의자로 거론됐던 이모씨에 대해 보다 적극적인 증거조사가 필요하다고 보인다”며 “피고인이 아닌 제3자가 이 사건 범행의 진범이라는 내용의 우편이 대법원에 접수돼 있으므로, 그 부분에 대한 추가 심리가 필요한지도 검토를 요구한다”고 밝혔습니다.

"10명의 범인을 놓쳐도 1명의 억울한 사람 만들면 안돼"

이번 판결은 여러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누가 봐도 범인’일 지라도 직접증거가 없다면 섣불리 판단해선 안 된다는 대법원의 엄격함이 드러납니다. 10명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1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간접증거 혹은 더 아래 단계인 정황증거만으로 누군가를 평생 감옥에서 살게 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이 사건에는 범인을 속단해 다른 용의자에 대한 수사를 소홀히 했던 수사기관의 문제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한 경찰 출신 변호사는 “흉기나 DNA가 없으면 확실해보이는 간접증거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며 “하지만 그렇게 다른 가능성을 닫아버리는 순간 범인을 놓칠 가능성은 커진다”고 했습니다. 대법원의 판단대로 이 사건의 수사는 다시 진행될까요? 정말 양씨는 진범이 아닌 걸까요? 경찰과 파기환송 재판부가 어떤 판단을 내릴지도 지켜봐야 할 부분입니다.

판다

판다

※‘판다’는 ‘판결 다시 보기’의 줄임말입니다. 중앙일보 법조팀에서 이슈가 된 판결을 깊이 있게 분석하는 코너입니다

이후연 기자 lee.hoo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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