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경미한 학교폭력 학생부 미기재’ 두고 고심 깊은 교육부, 왜?

중앙일보

입력

교육부는 지난해 학교폭력 개선방안을 정책숙려제 안건으로 제시했다. [중앙포토]

교육부는 지난해 학교폭력 개선방안을 정책숙려제 안건으로 제시했다. [중앙포토]

중학교 2학년 딸을 둔 이모(44)씨는 지난해 말 황당한 일을 겪었다. 자녀가 학교폭력의 가해자로 지목됐기 때문이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딸의 친구 A양이 딸 때문에 등교하기가 무섭다고 해, A양 부모의 요청으로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학폭위)가 열린 것이다. 이씨가 아이에게 확인해보니 “평소 친하게 지내던 A가 외모 비하 등 자신의 험담을 해 친구들과 함께 ‘뒤에서 욕하지 말라’고 경고했다”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학폭위 회의에서는 딸의 서면사과처분이 결정됐다. 이씨는 “A가 먼저 언어폭력을 쓴 가해자인데 왜 우리 애만 처벌을 받아야 하느냐”며 학교 결정에 반발했고, 행정소송을 준비 중이다.

이씨처럼 자녀의 학폭위 조치를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학부모들이 많다. 이씨 자녀가 받은 징계(서면사과)는 가해 학생 징계 조치 중 가장 가벼운 1호에 해당한다. 문제는 학폭위 조치가 자녀의 학교생활기록부(학생부)에 기재된다는 데 있다. 경미한 사안이라도 학교폭력 가해자라는 꼬리표가 붙게 되면 자녀의 진로·진학에 악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학부모들은 이를 막기 위해 소송전도 불사한다. 학교현장이 법적 분쟁의 온상지가 되는 일이 적지 않은 이유다. 교육부 통계에 따르면 지난 5년간 학폭위 처분 결과에 불복해 재심을 청구한 건수는 2013년 764건에서 2017년 1868건으로 2배 넘게 늘었다.

교육부 세종청사 전경. [연합뉴스]

교육부 세종청사 전경. [연합뉴스]

학교폭력 제도개선 방안 발표 두 달 미뤄져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육부는 지난해 11월 정책숙려제를 통해 학교폭력 처리절차를 개선하겠다고 나섰다. 경미한 학교폭력의 경우 교장이 자체 종결할 수 있게 하고, 학생부에 기재하지 말자는 내용이다. 하지만 두 달이 지난 현재까지 선뜻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이상돈 교육부 학교생활문화과장은 20일 “교육부가 제시한 안에 대해 정책참여단과 국민설문조사 결과 사이에 의견 차이가 있어 사회적 공감대를 이끌어 내는 과정이 좀 더 필요하다고 판단했다”며 “최종 논의를 거쳐 이르면 1월 말, 늦어도 2월 초까지 최종안을 발표하겠다”고 말했다.

교육부는 당초 11월 말에 학교폭력 제도개선에 대한 정책숙려제 결과를 발표할 계획이었다. 교사·학생·시민단체·변호사 등 약 30명으로 구성된 정책참여단 의견과 국민 2200명(교원 400명, 학생 400명, 학부모 400명, 시민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를 합쳐 결론을 낼 방침이었다. 하지만 이들 간의 의견이 하나로 모이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정책참여단은 교육부안에 대체로 찬성했지만, 설문조사 결과는 반대 의견이 더 많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과장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종합적으로 검토해 최종안을 마련할 것”이라면서도 “학교폭력 문제를 교육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기본 취지는 변함이 없다”고 설명했다.

학교폭력 개선방안은 피해 학생과 학부모가 원치 않으면 학교장이 학교폭력을 열지 않고 자체 해결하는 ‘교장 자체 종결제’와 경미한 처벌을 받았을 때 학생부에 기재하지 않는 ‘학생부 미기재’가 핵심이다. 경미한 학교폭력은 가해 학생 징계 조치 1~3호인 서면사과나 접근금지, 교내 봉사다. 현행법(학교폭력 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상 학폭위는 학교폭력 사안이 발생하면 가해 학생에게 9가지 징계처분 중 반드시 1가지 이상을 내려야 하고, 이를 학생부에 기재하는 게 원칙이다. 그러다 보니 사소한 다툼까지 학폭위가 열려 ‘애들 싸움’이 ‘부모싸움’으로 번지는 일이 잦았다.

지난해 7월 강원 철원여자중학교에서 열린 '평화의 벽 제막식'에서 학생들이 벽에 적힌 메시지를 읽고 있다. '평화의 벽'은 철원여중이 학교폭력 없는 1천234일을 맞아 지역주민과 함께 만든 기념물이다. [연합뉴스]

지난해 7월 강원 철원여자중학교에서 열린 '평화의 벽 제막식'에서 학생들이 벽에 적힌 메시지를 읽고 있다. '평화의 벽'은 철원여중이 학교폭력 없는 1천234일을 맞아 지역주민과 함께 만든 기념물이다. [연합뉴스]

교육계에서도 학생부 기재방안 찬반 엇갈려

교육부 시안에 대해선 교육계 내에서도 찬반 논란이 거세다. 최근 인천시교육청이 교육부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히자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과 한국교원총연합회(한국교총) 간의 갈등이 불거진 게 대표적이다. 전교조 인천지부는 “경미한 학교 폭력까지 학생부에 기재하면 억울하게 누명을 쓴 가해 학생에게 피해가 갈 수 있다”며 교육부 안을 지지하고 나섰다. 반면 인천 한국교총은 “학생부 기재 폐지의 필요성에는 공감하지만, 마땅한 대안 없이 무조건 기재하지 않을 경우 학교폭력이 더욱 증가할 우려가 있다”는 입장을 내놨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정제영 이화여대 교육학과 교수(이화여대 학교폭력문제연구소 부소장)는 학교폭력 수준에 따른 맞춤형 대응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학생끼리 서로 ‘미안하다’고 진심으로 사과하면 끝날 일이 학폭위가 열려서 부모 간의 갈등으로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정 교수는 “범죄에 해당할 정도로 지속적이고 심각한 학교폭력은 엄중하게 처벌해야 하지만, 장난 같은 사소한 다툼까지 학폭위에서 해결하다 보면 오히려 교우관계를 훼손시킬 수 있다”며 “또 학교폭력의 학생부 기재와 관련해 민원·분쟁·소송 등이 이어지는 만큼 경미한 사안은 학생부에 기재하지 않고 학교장이 종결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조정실 학교폭력피해자가족협의회 회장은 “교육부안대로 제도가 개선되면 학교폭력이 더욱 증가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학교폭력 가해 사실을 학생부에 기재하는 게 실제로 학교폭력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는데, 경미한 학교폭력을 기재하지 않을 경우 학생들이 이를 악용할 가능성도 있어서다. 조 회장은 이어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며 “학교 마음대로 사건을 축소·은폐하다 적발되면 학교장을 강력하게 처벌하고, 학생부도 1~3호에 한해 ‘미기재’가 아닌 ‘기재 보류’를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기재 보류’는 졸업할 때까지 학교폭력 문제가 다시 발생하지 않으면 학생부에 남기지 않지만, 재발할 경우에는 기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교육부 개선방안이 학교현장의 법적 분쟁을 줄이는 데 실효성이 없을 거라는 주장도 나온다. 조성철 한국교총 대변인은 “학교폭력 중 경미한 사안만 학생부에 기재하지 않으면 4~6호 조치를 받은 가해 학생의 학부모들은 징계 조치를 1~3호로 낮추기 위해 소송을 할 수밖에 없다”며 “개선안이 학교현장에 적용돼도 학교폭력 소송으로 인한 폐해는 현재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민희 기자 jeon.minhee@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