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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균형·책임감’ 베버에 반한 문희상·정세균·김병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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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9호 05면

[SPECIAL REPORT] 베버 『소명으로서의 정치』 100년 - 최장집·박상훈 대담 

국회의 수장은 문희상 국회의장, 전반기엔 정세균 전 의장이었다. 처음 배지를 단 게 27년, 23년 전이다. 그사이 당 대표를 지냈으며 청와대(문 의장, 대통령 비서실장)와 정부(정 전 의장, 산업부 장관)에서도 일했다. 정치라면 산전수전에 공중전까지 치른 이들이다.

‘인생의 책’ 꼽는 정치인 많아 #안철수도 “정치는 책임지는 것” #3김 이후 새 리더십 찾으려 관심

이 둘이 한 언론의 연재물 ‘내 인생의 책’에서 같은 선택을 했다. 막스 베버의 저작으로 번역이 달리 된 『직업으로서의 정치』(문 의장),『소명으로서의 정치』(정 전 의장)다.

문 의장은 2017년 7월 글에서 “베버가 좋은 정치인의 덕목으로 열정, 균형감각 그리고 책임감, 이 세 가지를 들고 있다”며 “나는 베버의 세 가지 덕목을 가슴(열정), 머리(균형감각), 배(책임감)로 구분한다”고 말했다. 정 전 의장도 2016년 7월 정치가의 세 가지 덕목을 언급하며 “베버의 지적처럼 정치란 폭력을 다루는 기술이다. 정치 행위에서 균형적 판단과 절제를 잃으면 파괴적인 폭력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자유한국당 소속이나 한때 바른정당(바른미래당 전신)에 합류하고 싶어해 당으로부터 당원권 정지란 처분을 받은 적이 있는 김현아 의원도 정지 기간 중이던 2017년 7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아직 정치가 뭔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요즘 정치 관련 책들을 많이 읽고 공부하고 있다”며 예로 든 게 막스 베버 책이다. 김병준 한국당 비대위원장도 언급한 바 있다.

여의도만이 아니다. 지난해 6·13 지방선거 후 닷새 만에 열린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이 보고한 문건(‘문재인 정부 2기 국정운영 위험요소 및 대응방안’)에도 베버가 담겼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관련 브리핑에서 “청와대 공직자에게 필요한 것은 ‘신념윤리’가 아닌 ‘책임 윤리’다. 막스 베버의 이야기를 인용해서 신념윤리가 아닌 책임윤리라는 점을 강조했다”고 전했다.

막스 베버가 대한민국 정치에서 말 그대로 공명을 일으키고 있다.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은 “베버는 스스로 부르주아 학자라고 늘 말했고, 현실정치에선 우리식으로 말하면 민주당 내 조금 개혁적인, 보통 학계에서는 좌파 자유주의 전통에 서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의 생각이 보수와 진보를 넘나들어 민주주의와 정치가의 역할에 대해 상상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된다”고 말했다. 이는 데이터로도 드러난다. 뉴스 빅데이터 분석시스템 ‘빅카인즈(BigKinds)’에서 중앙일간지를 대상으로 ‘막스 베버’와 ‘정치’란 키워드를 넣어 1990년 이후 기사를 검색하면 그 빈도수가 2008년 이후 크게 늘었다. <그래픽 참조>

정치인이 직접 언급하는 경우도 늘었는데, 안철수 전 의원도 한 사례다. ‘안철수 현상’이라고 불릴 정도로 지지 바람이 불던 2012년 6월 안 전 의원은 일종의 정치 출사표인 『안철수의 생각』을 발간했다. 여기엔 “독일의 정치철학자인 막스 베버는 『소명으로서의 정치』에서 정치인은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를 함께 가져야 한다고 했다. 개인적 신념을 가질 뿐만 아니라 아무리 힘들더라도 이 신념을 현실 세계에서 이뤄내야 한다는 뜻”이라고 적었다. 그는 2016년 6월 국민의당 당 대표에서 물러나며 “정치는 책임지는 것이다. 막스 베버가 ‘책임윤리’를 강조한 것도 그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1990년대 베버가 중앙일간지 보도에 인용된 게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였던 것과 비교하면 큰 차이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전문가들은 한국적 정치 상황이 베버의 저작을 꺼내 들게 한다고 말한다. 민주화 시대와 함께 ‘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 정치’가 종언을 고한 이후 보수 진영이든 진보 진영이든 새로운 정치, 새로운 리더십을 모색하는 데 진통을 겪고 있기 때문이란 것이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의 진단이다.

“우리의 경우는 민주화운동·촛불시위를 거치면서 스스로 주관적으로 생각하는 개인 수준에서의 정치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민주주의라고 생각하고. 시민들이 주권자이기 때문에 시민의 의사, 시민이 말하고 요구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우월하고 좋다고 여긴다. 사실 이런 관념은 굉장히 비정치적이다.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대로 결함이 있는 것이고, 정치 현실 속에서 권력을 다루고 이를 통해 좋은 제도를 만들어 정치인들이 소명의식을 갖고 한 발짝씩 발전시켜 나갈 때 비로소 천천히 사회나 정치가 향상되는 것이다. (베버는 책을 통해) 너무나 냉정하게 현실주의적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 책은 굉장히 정치와 정치적 실천과 정치 이론에 있어 고전 중의 고전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보수·진보 진영 사이엔 관심을 갖게 되기까지 시차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회창-이명박-박근혜란 견고한 리더십이 있던 보수 진영과 달리 노무현 전 대통령 이후 새로운 리더십을 만들어내는 데 고전했던 진보 진영이 먼저 주목했다는 것이다. 한 진보학자는 “2012년 대선에 패배한 후 다시 정치는 뭔가 고민하게 됐고 베버를 공부하게 됐다”고 말했다. 최근엔 보수 진영에서도 베버에 대해 말하는 이가 늘었다.

탐사보도팀=고정애·하준호 기자 ockham@joongang.co.kr
베버(1864~1920)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에 활동한 독일의 사회과학자이자 사상가이다. 정치·경제·사회·역사·종교 등 학문과 문화 일반에 대해 두루 조예가 깊었다. 대표작으론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 꼽힌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쉰의 나이에도 참전, 야전병원에서 근무했다. 1919년 1월 바이마르공화국 최초의 총선에 출마해 낙선한 경험도 있다. ‘직업으로서의 정치(또는 소명으로서의 정치)’ 강연 때 베버는 “10년 후 이 문제에 우리 다시 한번 이야기하자”고 했다. 그러나 이듬해 6월 56세의 나이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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